관객들이 고민을 싫어하는 탓일까, 아니면 영화계의 상상력이 부족한 탓일까. 한국 영화의 가라앉을 줄 모르는 코미디 붐을 둘러싸고 다양한 의견들이 엇갈리고 있다. 왼쪽부터 '광복절 특사' '색즉시공'(위) '몽정기' '가문의 영광' '재밌는 영화'(위) '일단 뛰어'. 동아일보 자료사진
관객들은 웃고 싶어한다.
올해 초 ‘공공의 적’과 ‘집으로…’를 제외하고 관객들에게 ‘선택’받은 한국 영화는 전부 코미디다. ‘가문의 영광’(4주 연속 1위), ‘광복절 특사’(3주 연속 1위)같은 히트작들 뿐 아니라 ‘해적 디스코왕 되다’ ‘몽정기’처럼 흥행 1위를 최소 1주 이상 해본 한국영화들의 공통점은 모두 코미디 영화라는 것. 내일 개봉되는 코미디 ‘색즉시공’도 전국 121개이던 상영관이 12일 현재 170개까지 늘어났다.
올해 개봉된 한국영화 61편 가운데 코미디는 26편. 단일 장르로는 가장 많다. ‘일단 뛰어’ ‘네발가락’ ‘유아독존’처럼 주목을 받지 못한 ‘자잘한’ 코미디가 유난히 많은 것도 올해의 특징. ‘엽기적인 그녀’등 지난해부터 일기 시작한 한국영화의 코미디 붐이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는 이유는 뭘까.
●달라진 관객들
충무로에서는 ‘공동경비구역 JSA’가 올해 개봉됐더라면 ‘빅 히트’를 거두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한다. 너무 무겁기 때문. 요즘 관객들이 영화를 가볍게 소비하는 경향이 심해졌다는 것이다.
강우석 감독은 “멀티플렉스가 확산된 뒤 영화는 ‘문화’가 아니라 ‘레저’가 되어 버렸다. 요즘 관객들은 ‘완성도가 떨어져도 재미있는 게임’을 원하는 듯하다”고 분석했다.
심재명 명필름 대표도 “2년 전만 해도 한국영화의 주 관객은 20대 중반이었는데 요즘은 이전에 한국영화를 보지 않던 10대들”이라며 “이 새로운 관객들은 컨셉트와 감성이 단순하고 확실한 영화들을 선호하는 것 같다”고 진단했다.
●제작, 투자자들의 변화
‘성냥팔이소녀의 재림’등 거액의 액션 대작들이 잇따라 실패한 뒤 요즘 투자자들은 ‘안전’한 영화로 코미디를 선호하는 추세다. 박광수 감독이 준비하던 ‘방아쇠’는 캐스팅까지 마쳤는데도 투자자들이 외면하는 바람에 최근 제작진행이 중단됐다. 김길남 길벗영화사 대표는 “투자자들이 ‘방아쇠’가 너무 무겁다고 해서 시나리오 수정작업 중”이라며 “영화투자 관행이 코미디로만 쏠리다보니 다른 소재들이 외면받고 있다”고 개탄했다.
코미디 영화 ‘2424’를 만들었던 JR픽처스 안창국 대표도 “요즘 영화 투자자들의 투자 기준은 ‘톱 스타’ 아니면 코미디”라고 말한다. 톱 스타를 캐스팅하지 못할 바엔 아예 자극적인 코미디를 만드는 것이 더 안전하다는 제작자들의 판단도 코미디 붐에 한 몫 했다.
그러다 보니 서로 모방하는 조폭류 코미디, ‘두사부일체’ ‘가문의 영광’처럼 아이디어는 기발하나 완성도는 떨어지는 코미디 영화들이 쏟아지는 것. 심재명 대표는 “코미디로 대표되는 요즘 한국영화들은 할리우드에 리메이크 판권을 팔만큼 기획력과 아이디어는 향상됐으나 완성도는 퇴행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엇갈리는 실망과 기대
제작자들은 코미디 붐이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는 데 대부분 동의한다. 경기가 침체되면 ‘믿을 건 이 것 밖에 없다’는 심리로 부동산에 돈이 몰리듯, 코미디도 시류를 잘 타지 않으며 적은 투자로 큰 수익을 노려볼 수 있는 장르이기 때문.
대다수는 이같은 코미디 붐에 대해 우려하는 분위기다. 노종윤 싸이더스 제작이사는 “성공 사례를 모방한 졸작 코미디들이 계속 양산되다간 결국 영화에 대한 투자가 위축되고 관객의 폭도 좁아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영화평론가 심영섭씨는 “코미디는 기존의 체제를 역전시켜 웃음을 유발하는, 사회적 전복력이 있는 장르다. 요즘 코미디에서 아쉬운 점은 하룻밤 잔 남자와 꼭 결혼해야 한다는 설정을 깐 ‘가문의 영광’처럼, 코미디의 근원적 힘을 망각하고 지극히 보수적인 스토리 텔링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코미디 붐이 “한국영화산업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이고 바람직한 현상”이라는 시각도 있다. 이준익 씨네월드 대표는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처럼 영화 강국일수록 코미디가 강하다. 우리가 보면 재미없지만 자국민은 좋아하는 프랑스 코미디 영화들처럼, 코미디는 자국 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이라고 말했다.
김희경기자 susan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