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발 5000m가 넘는 곳은 ‘신의 땅’이다. 베이스 캠프에서 신의 허락(좋은 날씨)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은 피가 마른다.대원들끼리도 서로 아무 말 하지 않는다. 그럴때마다 박씨는 붉게 물든 저녁 노을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러면 그 자신이 한없이 작은 존재라는 생각이 들며 어느새 차분해진다. 사진은 남극 최고봉(빈슨 매시프.뒤 오른쪽) 등정길에 잠시 휴식을 취하는 박영석씨.사진제공 박영석씨
#산에 가면 ‘강 같은 평화’가 온다.
남극 최고봉 빈슨매시프(해발 4897m)에 오른 산악인 박영석(39·골드윈코리아,동국대산악부OB)씨. 지난 5일 만난 그의 얼굴은 바로 전날 귀국한 사람치곤 놀랄만큼 해맑았다.
“시차 때문에 피곤했을텐데….” “오자마자 소주 한병 들이키고 잤더니 말짱해졌습니다.” “춥지 않았나요?” “아이고, 얼어 죽는 줄 알았습니다.그래도 히말라야는 땅기운이라도 있지, 남극은 얼음 구덩이에서 찬 기운이 올라오는데다 초속 20m가 넘는 칼바람까지 불어대니….”
박씨의 목표는 세계 최초로 ‘산악 그랜드슬램(히말라야 8000m급 14좌·세계 7대륙 최고봉·세계 3극점을 모두 밟는 것)’의 주인공이 되는 것. 앞으로 남극점과 북극점만 남았다. 그는 왜 산에 오를까.
“지난 10년간 한 해에 7,8개월은 얼음구덩이에서 살았습니다. 산에서 돌아오면 다음 산에 오르기 위해 스폰서 찾으러 다니고…. 오산고 2년때 동국대산악부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마나슬루 등정에 성공하고 카퍼레이드 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 때 바로 저거다라는 ‘필(느낌)’이 꽂히더라구요.”
# “난 전생에 고산족, 평지에 내려오면 어지럽다”
박씨는 건망증이 심하다. 집 전화번호 생각이 안나 애를 먹은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휴대폰도 벌써 10개 이상 잃어 버렸다. 현금카드로 돈을 빼면 현금이나 카드 중에 하나는 두고 나온다. 박씨는 이를 고산병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해발 5000m가 넘는 높은 산에 오르면 뇌세포가 조금씩 파괴된다는 것.
“고산에 올랐다가 내려오면 한동안 정자가 형성되지 않는다는 말이 있던데….”
“두 세달은 그렇다고 합디다. 그러나 난 특이 체질인가봐요. 히말라야 정기를 받은 아들이 둘씩이나 있습니다. 그러나 내 머리는 엉망이예요. 손가방도 목에 둘러매지 않으면 언제 잃어 버릴 지 모릅니다.”
천하의 산꾼인 박씨지만 평지에 내려오면 ‘5걸음 이상’은 무조건 차를 탄다. 걷는 게 지긋지긋하기 때문이다.또 낮은 땅에 내려오면 한 두달 동안 머리도 멍해진다. “피가 끈적끈적 해지는 느낌”이라는 것. 그러다 고산에 오르면 다시 머리가 맑아진다. 박씨는 “아무래도 전생에 고산족 셰르파였던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박씨는 산에서 술도 잘 마시고 담배도 피운다.
“해발 7000m 넘는 곳에서 셰르파와 담배를 피운 적이 있어요. 산소가 부족해 뻑뻑 세게 빨아야 되는데 몇모금 빨자 머리 속이 하얘지고 별이 반짝반짝 하더군요.”
#산이 점점 더 무서워 진다
박씨는 키 174㎝에 몸무게 75㎏. 히말라야의 8000m급 봉우리에 한번 오르면 몸무게가 10∼15㎏이나 빠진다. 지난해부터 체력이 달리는 것을 느낀다. 걸을 때마다 무릎 관절에서 소리가 나고 어깨도 안좋다. 91년 히말라야 남서 루트로 등정하다 100m나 떨어지는 사고로 왼쪽 얼굴뼈에 쇠못을 3개나 박았다.
“산이 무섭습니까?”
“점점 더 무서워 집니다. 젊었을 땐 깎아지른 절벽도 겁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해발 5000m 넘는 곳은 ‘신의 땅’입니다. 신이 허락 해주지 않으면(악천후) 겸손하게 내려와야 합니다. 93년 에베레스트 남서벽 루트로 등반하던 중 발을 헛디뎌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적이 있습니다. 그 때 20∼30분 동안 엉엉 울었어요. 산에서 인간은 정말 티끌같은 존재지요.”
“정상에 오르면 기분이 짱이겠네요?”
“그 기분은 잠깐에 지나지 않습니다. 기쁨보다는 이제 더 올라가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먼저지요. 다음엔 어떡하든 살아서 베이스캠프까지 내려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고…. 그 힘든 길을 어떻게 다시 내려가지 하는 두려움도 몰려옵니다.”
#“난 대원들을 7명이나 죽인 죄인”
다음날인 6일 박씨와 광화문 근처 소주집에서 다시 만났다. 그는 무슨 술이든 잘 마시지만 폭탄주엔 약하다고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결국 폭탄주가 돌았다.
술이 오르자 그의 눈에 물기가 번졌다. “난 애들을 7명이나 죽인 죄인입니다.” 지난 10여년 동안 그는 셰르파 2명을 포함한 대원 7명을 히말라야의 눈 속에 묻었다.
그는 한동안 말없이 담배만 피워댔다. “죽은 후배들 생각이 납니까?” “신이 왜 날 살려 뒀는지 모르겠습니다. 대원들이 죽은 장소를 다시 지날 때면 그 아이들 목소리가 들려요. ‘형 외로워. 나랑 같이 있어줘.’ 그러면 난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 하지만 형은 아직 할 일이 있단다. 내가 무사히 갔다 오도록 빌어 다오.’ 신은 왜 꼭 착한 사람들을 먼저 데려가는지 모르겠어요.나같이 놈은 놔두고….”
박씨는 히말라야 등정 31번에 18번 성공하고 13번은 실패했다. 그는 26세부터 늘 등반대장을 맡았다. 96년 안나푸르나 등정땐 비용을 마련하려고 시흥에 있던 31평짜리 아파트까지 처분했다.
산에서 내려오면 그는 바다로 간다. 바닷속 깊이 내려가면 산에 오를 때처럼 머리가 다시 맑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취미는 스킨스쿠버. 마스터 자격증이 있을 만큼 수준급이다.
잠시후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박씨가 먼저 마이크를 잡았다. “아∼바보처럼 살았군요∼.” 목소리가 금세 잠기더니 끝내 목이 메었다. 그의 목엔 작은 가방이 떨어질세라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김화성기자 mar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