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1:
2001년 7월 서울 강남구 신사동 씨네플러스 영화 ‘엽기적인 그녀’ 시사회장. 영화가 시작되자 객석 중간에서 반짝이는 빨간 점 4개의 모습이 선명해진다. 통로에 서 있던 제작사 신씨네(대표 신철) 직원들은 순간 긴장한다.
:장면2:
영화광인 최모씨(26)는 이날을 기다려왔다. 개봉 전에 영화를 인터넷에 띄워야 직성이 풀리는 그는 가방에 캠코더를 숨기고 시사회장에 들어왔다. 조명이 꺼지자 그는 캠코더를 꺼내 스위치를 켰다. 신씨네 직원의 손이 렌즈를 가린 것은 그때였다
“영화를 ‘찍으시면’ 안 됩니다.”
▽개봉 때까지 기다리면 바보(?)〓개봉 전 복제된 영화가 와레즈(Warez·‘Where is it’의 차음으로 저작권을 침해하는 콘텐츠를 주고받기 위해 만든 사이트)나 P2P(Peer to Peer·개인 대 개인) 서비스를 통해 인터넷에 유포되고 있다.
13일 개봉된 ‘해리포터와 비밀의 방’은 지난달 15일 미국에서 개봉되자마자 인터넷에 대량 유포됐다. 19일 개봉되는 ‘반지의 제왕-두 개의 탑’도 인터넷에서 어렵지 않게 구해볼 수 있다.
한국영화도 최씨 같은 사람이 제작한 ‘엽기적인 그녀’ ‘조폭마누라’ 등이 개봉 전에 나돌자 국내 영화업계는 긴장하고 있다.
▽해적판 만들기〓주로 정보기술(IT)업계 종사자인 해적판 제작자는 세계 곳곳에서 동호회 단위로 ‘활약’한다.
이들은 ‘내가 먼저 띄웠다’는 칭찬을 듣기 위해 온갖 테크닉을 동원해 해적판을 만든다. 돈을 버는 경우는 거의 없다.
최씨처럼 시사회장에서 캠코더로 영화를 ‘찍는’것은 가장 초보적인 기법.
캠코더 촬영의 약점 때문에 한동안 ‘가(假)편집본’이 인기를 끌었다. 개봉을 앞두고 제작사나 스폰서에게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 놓은 VHS 카세트 중 하나를 내부 직원이 훔쳐내 이를 동영상 파일로 만들어 인터넷에 유포하는 형태다.
최근에는 ‘홈시어터’ 수준의 해적판이 인기다. 국내에는 개봉 전이지만 외국에서는 디지털비디오디스크(DVD)로 나온 영화들이 대상이다. 구입한 DVD에서 소스를 뽑아내 DivX 형식으로 다시 제작하는 것.
DivX 파일은 화질과 음질이 비슷하면서도 파일 크기가 DVD의 2분의 1밖에 안 돼 인터넷으로 주고받기에 알맞다.
▽해적판 보기〓회사원 김동석씨(가명·29)는 P2P서비스나 와레즈 사이트에서 영화를 다운로드해 복사한 CD 3000장을 갖고 있다. 그는 ‘구루구루’ ‘e돈키’ 등 동호회원끼리 파일을 나눠 가질 수 있는 P2P도구로 정보를 교환한다.
김씨는 “개봉 전 영화를 보면 ‘나는 다르다’라는 특권의식이 생긴다”고 말했다.
▽디지털 배급〓인터넷 영화관 무비스(www.movies.co.kr)의 박준선 사장은 “해적판은 시사회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품질이 아무래도 영화보다 못하기 때문에 해적판을 본 ‘특권층’ 상당수는 입소문을 퍼뜨리며 영화관으로 향한다는 것.
고화질 영화를 서비스하는 하나포스닷컴(www.hanafos.com) 박찬웅 차장은 “인터넷을 새로운 영화 유통경로로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인터넷 판권에 대한 금액과 시기를 비디오와 DVD 수준으로 앞당겨 인터넷 영화감상을 활성화, ‘인터넷〓해적판’이라는 공식을 깨야 한다는 것이다.
▽해결 과제〓지난해 12월 DVD로 나온 ‘엽기적인 그녀’는 올 2월 홍콩 싱가포르 등 동남아에서는 영화관에서 상영됐다. 중국에는 DVD 판권만 팔았으나 중국의 한 포털업체가 신씨네의 허락없이 영화를 인터넷으로 주문형비디오(VOD)서비스를 했다.
신씨네측은 중국 내 DVD 판권을 보유한 ‘차이나스타’에 해결책을 요구했다.
차이나스타측은 “VOD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불법복제 DVD가 400만∼1000만개가 팔렸다”며 “대책은 없다”고 말했다.
신씨네 기획실의 신범수씨는 “손실액이 100억원대에 달했지만 ‘중국을 조심하자’고 다짐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말했다.
최근 일부 작품을 비디오 DVD보다 인터넷에 먼저 개봉하는 등 ‘인터넷 개봉 실험’ 중인 씨네마서비스 배급팀의 김동현 과장은 “해적판에 의한 손실은 있으나 인터넷 개봉 시장의 규모를 가늠할 수가 없어 인터넷 배급에 적극 나서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나성엽기자 cp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