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이 며칠 앞으로 다가오면서 후보들의 발언 수위도 점차 높아지고 있다. 이회창 후보는 ‘안정이냐 불안이냐’를 막판 선거구호로 내걸었고, 노무현 후보는 ‘전쟁이냐 평화냐’라는 구호로 부동층을 공략하고 있다. 선거는 유권자의 이성과 감성에 호소해 자신을 지지하게 만드는 것이지만 지금은 그 선동의 정도가 위험수위에 육박해 유권자들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일종의 협박으로까지 보인다.
선거를 한달 앞두고도 후보가 확정되지 못해 이번 선거는 싱겁게 끝날 줄 알았더니 후보단일화로 역대 선거와 똑같은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몇 주간 특별한 이슈 없이 진행되던 선거 막판에 ‘행정수도 이전’과 ‘북한 핵’ 문제들이 부각되면서 선거열기가 고조되어 승부를 예상하기 어렵게 됐다. 선거 판세의 혼전은 양 후보 진영을 더 몸 달게 하고 있다. 그 결과 구호의 선동성은 도를 더하고 있다.
▼이성적 근거없는 흑색선전▼
‘안정’과 ‘평화’는 모두 좋은 것이다. 후보들은 모두 자신이 그것을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불안’과 ‘전쟁’은 모두 나쁜 것이다. 후보들은 상대 후보가 정권을 잡으면 그렇게 될 것이라고 해 상대 후보를 찍지 말 것을 국민에게 호소한다. 흑백논리의 극치다.
그러나 감성적인 비방과 이성적인 검증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검증은 있는 사실을 가지고 이성적으로 평가하는 것이고, 네거티브 전략은 의혹이나 가능성을 가지고 확증 없이 감성에 호소해 비방하는 것이다. 이번 선거는 확실한 지지기반을 지닌 3김의 역대 선거와는 달리 ‘싫은 사람을 찍지 않는 역(逆)선택’이 주도하는 선거여서 검증과 비방이 더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 점에서도 두 후보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 이회창 후보는 지난 대선에도 출마했기 때문에 처음 출마하는 노 후보 보다는 상대적으로 검증기간이 길었다고 할 수 있다. 대선을 포함해 5년 이상 혹독한 검증을 거친 반면, 노무현 후보는 이제 20여일 동안만 검증받는 과정에 있다. 이 때문에 노 후보의 ‘불안’과 이 후보의 ‘전쟁’ 우려에 대한 비판은 서로 차원이 다르다고 본다.
두 후보의 상대에 대한 비판과 비방은 노골적이다. 한나라당은 ‘노 후보가 급진적이며, 말을 자주 바꾸고, 햇볕정책 계승자로 핵 문제를 말할 자격이 없으며, 노·정 공조로 각종 부패게이트 진상 규명이 어렵고, 국민과 단 한마디 상의도 없이 즉흥적으로 수도 이전을 발표한 불안한 후보’라고 비판한다. 이에 질세라 민주당은 ‘이 후보가 대결을 부르짖어 한반도에 전쟁 불안을 조성해 외국인 투자가 썰물처럼 빠져나갈 것이고, 행정수도 이전에 대해 집값 폭락이라 흑색 선전하는 낡은 정치의 표본인 후보’라고 반격한다. 장군에 멍군이다.
여기에는 후보자와 유권자 모두의 책임이 있다. 정책공약 중심의 경쟁이 유권자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공약을 서로 수렴해 차별성이 당초보다 줄어든 데 주원인이 있다. 특히 입장이 서로 다른 노 후보와 정몽준 대표의 후보단일화가 정책공조를 명분으로 정책차별성과 일관성을 저해하면서 공약은 승리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번 선거는 3김 이후 지역주의의 폐해가 줄어들고 반대로 세대와 계층 갈등이 사회균열의 첨예한 변수로 등장해 모처럼 선진국과 같이 공약의 차별성을 중심으로 선택이 이루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후보간의 이합집산과 상호수렴은 그 기회를 앗아간 것이다.
▼국가장래 신중히 결정해야▼
또한 이성과 감성에 각각 따로 중점을 두고 호소하는 두 후보 진영의 선거 전략과 미디어선거로의 변화도 정책의 중요성을 희석시키는 데 공헌했다. 새로운 감성세대의 등장과 미디어선거는 유권자에게 이미지와 감성을 더 중요하게 해 정책문제의 복잡성을 외면하고 구호의 중요성을 더 높였다. 이로 인해 구호의 선동성과 유권자 협박은 부각되고 후보의 자질이나 정책의 이성적 검증은 소홀해졌다.
정상적인 검증과 흑색선전이 혼재한 이번 선거의 막판에 이성에 따른 검증의 차원에서 ‘불안’과 ‘전쟁’이 아니라 ‘안정’과 ‘평화’가 실현되는 선택이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대선이 국가의 장래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정치적 선택임을 냉정하게 되새겨야 한다.
김석준 이화여대 교수·행정학·´바른 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