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에는 스피커가 6개 달린 홈시어터, 주방엔 600ℓ짜리 양문형 냉장고와 드럼세탁기, 천장엔 매립형 에어컨, 벽면엔 조명과 엘리베이터를 원격 조종할 수 있는 홈패드….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 사는 주부 서소영씨(32)가 최근 들른 아파트 모델하우스는 이랬다. 가전제품에 붙은 꼬리표에 붙어 있는 설명은 ‘분양가 포함’. 전시용 상품은 침대와 커튼 정도가 고작이다.
“전자제품 대리점에 온 것 같아요. 분양가만 내면 그걸 다 설치해 준다니….”
아파트 모델하우스가 바뀌고 있다. 집만 파는 곳이 아니다. ‘주거시설’을 사고 파는 곳이 됐다. 당연히 아파트 분양에 건설회사만 참여하는 것도 아니다. 가전업체도 한몫하고 있다. 모델하우스가 이(異)업종 마케팅의 전형으로 부상한 셈이다.
▽모델하우스는 첨단 가전 전시장〓아파트에 각종 가전제품을 설치해 준 건 1999년 분양가 자율화 이후부터다. 고급형 아파트가 출현할 수 있게 됐기 때문.
처음에는 냉장고와 세탁기부터 시작했다. 작년부터는 1000만원이 넘는 홈시어터도 아파트에 달려나온다. 아파트에 주거시설 일체를 설치해 분양하는 빌트인(built-in) 방식이 일반화된 것이다.
가전업체가 가세했다. 놓칠 수 없는 시장이었다.
실제 삼성물산 건설부문(삼성건설)은 삼성전자와, LG건설은 LG전자와 함께 내부 인테리어를 꾸민다. 가전 관련 계열사가 없는 건설사도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빌트인용 가전제품을 따로 만들기도 한다. 삼성전자는 삼성건설의 주문대로 양문형 냉장고 두께를 10㎝ 줄여 공급한다. 아파트 벽면에 매립형으로 넣기 위해서다. 냉장고 두께를 줄이기 위해서는 생산라인 일부를 바꿔야 했다. 예전 같으면 생각도 못했을 일이다.
최근 이업종 마케팅은 좀더 공개적이다. 삼성건설은 9월 서울 강남구 일원동 모델하우스에 삼성전자와 함께 ‘홈시어터 전시관’을 열었다. 삼성건설이 내부 인테리어를 맡았다. 삼성전자는 입주민이나 방문객에게 자신의 집에 최적화할 수 있는 홈시어터 설계를 상담해주고 그 자리에서 직접 신청을 받는다.
개관 3개월 동안 상담을 받은 사람만 1만명을 웃돈다. 실제 계약률도 30%에 이른다. 삼성전자 홈솔루션팀 김범수 과장은 “최근에는 TV 에어컨 등 디지털 가전을 홈네트워크화해 통합관리하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말했다.
▽윈윈(win-win)〓‘건설’과 ‘전자’의 공동 마케팅은 기존에 없던 새 시장을 만들고 있다.
우선 빌트인 시장 규모가 팽창하고 있다. 2000년 3500억원에서 올해는 5400억원으로 54%나 커졌다. 가전업계에서는 2005년이면 빌트인 시장 규모가 1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건설회사도 고급형 주택을 판매할 수 있기 때문에 적극적이다.
대림산업은 입주가 임박한 아파트 현장에서 내부 시설 일체를 판매하는 ‘샘플하우스’를 열고 있다. 취지는 2∼3년 전 분양 당시와 바뀐 유행을 소개하는 것.
프라임산업도 가전제품은 물론 가구까지 일괄 공급하는 인테리어 상품을 선보일 계획이다.
LG건설은 아파트 설계 때부터 디자인팀과 가전업체 태스크포스가 함께 작업한다. 가전제품에 맞춰 아파트 내부를 꾸민다. 홈시어터용 배선 공간을 따로 만드는 것도 이 같은 결과를 반영한 것이다.
▽분양가 인상의 ‘면죄부’〓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첨단 가전제품과 주택의 결합이 주거문화를 한 단계 끌어올린 일등공신이라고 인정한다. 하지만 이는 곧 분양가 인상으로 이어진다는 점은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실제 올해 서울 아파트 평당 분양가는 작년보다 10% 이상 올랐다. 특히 40평형대 중대형 아파트는 30.3%나 급등했다. 43평형으로 치면 작년에는 평균 3억2594만원이었지만 올해는 4억2484만원에 이른다.
양문형 냉장고, 식기세척기, 가스오븐레인지 등을 모두 합쳐도 아파트 안에 들일 수 있는 가전제품은 3000만원이 채 안 된다는 게 업계의 설명. 그런데도 1억원을 올린 것은 폭리라는 비판도 나온다.
내집마련정보사 김영진 사장은 “건설회사들이 꾸며놓은 외관에 집착하기보다는 소비자 스스로 원가를 꼼꼼히 따져 적정 분양가를 유도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A건설사 관계자는 “분양가 상승이 단순히 가전제품 몇 개를 추가했기 때문은 아니다”며 “땅값 상승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인 만큼 건설업계의 상술로만 보지 말아달라”고 주문했다.
고기정기자 koh@donga.com
김창원기자 chang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