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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철칼럼]´정치 상품´과 ´소비자 선거´

입력 | 2002-12-18 18:03:00


16대 대통령선거전이 막바지에 이르자 유력 후보들은 얼른 보기에 대단히 간단 명료한 구호를 내걸었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안정이냐, 불안이냐’를,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는 ‘전쟁이냐, 평화냐’란 잣대를 내밀고 유권자의 선택을 요구했다. 대학수능시험을 앞두고 사설학원에서 유행한다는 족집게 과외처럼 매끈하게 요약한 답안지 같다는 인상마저 준다. 그런데 그것은 유권자가 양자 중 택일했을 때 자신에게 유리할 것이란 후보의 희망일 뿐, 유권자의 잣대는 아니다. 유권자의 마음은 그렇게 간단히 정리될 정도로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현정권의 지난 5년간 국정 혼란과 정치적 혼돈을 지켜본 유권자의 심중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 수도 있다. 산란해진 마음을 비집고 들어가려는, 급한 김에 나온 막바지 선거전략이라고 치부하면 그만이겠지만, 유권자에겐 나름의 선택기준이 있다. 그것은 쉽게 바꿀 수도, 바뀌는 것도 아니다.

▼´소비자´를 얕본다면▼

유권자는 정치란 상품의 소비자다. 요란한 선전 기술과 교언영색의 화술에 휘말릴 사람은 이제 많지 않다. 물건 하나 살 때도 소비자는 요모조모 따지고, 또 옆집 가게 물건과 값도 질도 비교하지 않는가. 포장이 그럴싸하고, 값이 싸다고 해도 선뜻 사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물건이 자기 생활에 앞으로 얼마나 유용한 것인지를 따지는 법이다. 보다 중요한 소비자의 기준은 한번 사다 쓴 상품의 질이다. 비싼 값에 주고 산 물건이 질도 형편없을 때 소비자는 속았다는 사실에 분노하기 마련이다. 설령 싼값이었다 해도 질이 나쁘다면 실망하고 만다. 분노하고 실망한 소비자가 다시 그런 물건을 사리라고 생각하는가. 소비자를 가볍게 봐서는 안된다. ‘소비자 정치’의 원리는 바로 여기에 있다.

매번 그랬지만 이번 선거운동도 거의 전투 수준에 육박했다. 선거란 전투를 고전적 병법에 대입한다면, 제왕의 실정에 반기를 든 반군과 이를 제압하려는 관군간의 싸움 구도다. 관군은 성을 더 높이 쌓아 수성에 전력할 것이고 반군은 성을 공략하기 위해 필사의 일전을 벌인다. 여기서 반군이 동원할 수 있는 가장 큰 무기는 민심이다. 애시당초 제왕 통치에 불만을 가진 민심의 지원이 없다면 반군은 반기를 들 수도 없을 것이다. 민심이 넘쳐나면 성을 무너뜨릴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패하는 법이다. 그런데 이번 선거에서는 희한한 현상이 벌어졌다. 제왕은 일찌감치 성에서 피해나갔고 지켜야 할 관군도 성을 버리고 들판에 나가 싸움을 벌였다.

그러나 제왕이 성을 비웠더라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있다. 표현은 다르겠지만 고금을 통해 변치 않는 ‘소비자 정치’ 원리다. 선거란 본질적으로 국정 상품에 대한 소비자의 평가다. 특히 어제 보도된 ‘청년 4명 중 1명 백수’란 뉴스는 충격적이다. 청년 실업이 얼마나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말해준다. 무직 또는 실직 상태의 청년이 133만명으로 고교 중퇴 이상 젊은이의 25%에 해당한다는 조사결과다(한국노동연구원 자료). 유치원 때부터 각종 학습지도를 받고, 초 중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얼마나 많은 과외공부를 해야 했는가.

▼청년 실업의 짙은 그늘▼

그러나 그렇게 힘들게 고교를 졸업했거나, 또 재수 삼수를 감내하며 대학교에 진학했던 젊은이들 4명 중 1명이 막상 졸업 후 취업할 곳이 없어 방황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올 상반기에 이미 청년 실업률(6.1%)은 전체 실업률(2.7%)을 3배 가까이 웃돌았다. 청년 실업은 이들이 희망을 잃었다는 의미다. 또한 가족과 주위 사람들의 실망은 어떻겠는가. 권력비리와 부패도 사회적으로 엄청난 상처를 남겼지만 미래를 설계할 젊은 자존심에 상처를 냈다는 것은 더 심각한 문제다. 이보다 더 큰 국가적 손실이 어디 있는가.

여기서 집권세력만이 아니라 국정의 한몫을 차지했던 견제세력에도 따질 일이 있다면 따져야 한다. 결국 선거란 국민에게 좌절감과 수치심을 안긴 사람이 누구인가를 가려내는 유권자의 찬반 판단이 모인 거대한 흐름이다. 그 흐름 속에서 소비자의 분노, 유권자의 분노는 도도한 물길을 이룬다. 누굴 찍든 민심의 메시지를 분명히 남겨야 한다. 오늘이 투표일이다.

최규철 논설주간 ki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