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도 저물고 있다. 미국이 1902년 필리핀을 평정한 지 100년, 즉 미국 제국이 형성되기 시작한 지 100년이 흘렀다. 같은 해에 영국 저널리스트인 W T 스테드는 ‘세계의 미국화’라는 책을 냈다. 영국의 일상생활에서 얼마나 미국산 수입품이 많은지 지적하며 영국뿐 아니라 세계 다른 지역에도 미국 소비문명이 침투하고 있다고 설파했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미국의 경제력을 내세운 글로벌라이제이션의 물결이 세계 각지를 덮치고 있다는 것이다. 필리핀으로의 무력진출이나 경제적 세계화는 모두 20세기 미국세력의 확장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사실 20세기는 군사 경제 문화 모든 면에서 미국의 세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U등 지역공동체 결성 가속화▼
21세기는 어떤가. 미국은 지난 세기와 마찬가지로 군사 문화적인 우위를 계속 유지할 것인가. 그렇다면 미국은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해 나갈 것인가. 앞으로 100년 후에도 세계는 미국이라는 유일한 패권국가에 의해 질서가 유지될 것인가. 아니면 전혀 새로운 움직임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갈 것인가.
명확한 예언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미국의 군사력이나 경제력이 당분간 계속된다고 해도 21세기의 세계는 20세기와는 다른 형태가 될 가능성이 있다.
20세기는 전반에는 세계가 제국주의에 의해 분할돼 소수 지배자가 대다수 인류를 억압했으며, 후반에는 식민지 지배가 붕괴해 신흥국가들이 성립됐는데도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는 데 비극이 있다. 미국은 20세기 초반 제국주의 국가로 출현했지만 그 후 민족자결주의를 제창, 독립 주권국가에 의한 국제질서를 추진해 왔다. 그러나 식민지주의도, 민족자결주의도 평화롭고 안정된 국제질서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100년에 걸쳐 많은 분쟁이 거듭됐고 20세기가 끝나고 보니 미국만이 강대국으로서 남은 결과가 됐다.
그런 대국이 국제질서를 어떻게 이끌겠다는 비전을 제시해 왔는가. 20세기 말에는 글로벌라이제이션이 미국 외교를 뒷받침하는 키워드였지만 그 자체는 ‘이념’이라기보다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평화롭고 안정된 국제질서를 쌓는 사상을 제공하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이념상 제국주의나 주권국가주의, 글로벌라이제이션이 아닌 새로운 국제질서의 비전은 생각하기 힘든 것일까. 그것이 21세기 초 더 절실해졌다. 이에 대한 하나의 대답을 시사하는 것이 지역공동체의 개념과 실체이다.
그 성공적인 예가 유럽연합(EU)이다. EU는 과거에 대한 반성을 토대로 각국 관계를 평화로운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생각해낸 것으로, 처음에는 프랑스 네덜란드 등 몇 개국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유럽의 대다수 국가가 참가하고 있다. EU 회원국간에는 이제 전쟁은 있을 수 없다. 역사상 획기적인 것이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머지않아 키프로스가 EU에 가입할 예정이며 터키도 가입 신청 중이라는 것이다. 터키가 가입한다면 이슬람권 국가도 유럽통합체에 가입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계속해 다른 이슬람 국가, 특히 북아프리카 각국도 이 지역공동체에 참가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거대 지역질서가 출현하면 미국에 필적하는 존재가 될 것이 확실하다.
아시아에 있어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활발해질 수 있다. 이미 동남아국가연합(ASEAN)이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등 몇 가지 지역공동체 구상이 만들어졌으며 최근에는 중국이 ASEAN과의 무역자유화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유럽과 마찬가지로 주권국가간의 대립이나 분쟁을 완화하는 수단으로서, 아시아에서도 거대지역연합이 형성된다면 인구나 시장 규모면에서 EU에 맞설 수 있는 존재가 될 것이다.
▼세계번영 꾀하는 패권국 돼야▼
또 서반구, 즉 미국대륙에서도 캐나다 미국 멕시코간의 경제적 통합은 시간문제이며 중남미 거의 대부분을 포함한 지역연합이 형성될 것이다. 호주나 뉴질랜드를 포함한 태평양-아메리카대륙간의 거대한 공동체가 될지도 모른다.
그런 지역질서가 각지에서 생겨난다고 해도 반드시 세계분할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각 지역간에 경제적 문화적인 교류는 계속될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대국인 미국의 역할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작년 9·11테러 이후 미국 여론은 어떻게 테러리즘으로부터 국토를 지킬 것인가 하는 것을 최대 관심사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그런 관점만으로는 패권국가 미국이 미래의 세계를 어떻게 그려나가고 있는지에 대한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다. 미국이 본토의 방위에 전심전력하고 있는 동안에도 각지에서는 지역질서의 재편이 착실히 진행되고 있다. 그 움직임을 정확히 인식해 국제사회 전체의 번영과 안정을 꾀하는 것이 미국의 임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임무를 미국이 수행할 수 있도록 각국도 협력할 필요가 있다.
이리에 아키라 미국 하버드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