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자료사진
대선 막판의 최대 변수로 돌출한 국민통합21 정몽준(鄭夢準) 대표의 노무현(盧武鉉) 후보 지지선언 철회의 배경을 놓고 정치권 안팎에서 추측이 무성하다.
당내에서는 추상적 명분보다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상황을 따져본 뒤 어느 쪽으로 결론이 나면 지체없이 행동에 들어가는 정 대표 특유의 스타일을 가장 큰 이유로 꼽고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노 후보에게 승산이 없을 것이란 계산 아래 공조파기의 타이밍을 노렸을 것’이라는 분석을 포함해 갖가지 관측이 나돌고 있다.
▽상황론〓일단 여론조사에서 우위를 유지하던 노 후보가 투표 2, 3일을 앞두고 정 후보가 이제는 이탈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에서 ‘집권 이후’에 대한 속내를 잇달아 드러낸 것이 파국의 직접적 계기라는 것이 정 대표측 관계자들의 대체적인 설명이다.
노 후보가 16일 유세에서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후보가 대북 현금지원을 중단하라고 하는데 그러면 남북관계도 대화도 끊긴다”고 말한 데 대한 정 대표의 반응이 단적인 예다. 정 대표는 민주당측과 통합21이 12일 공동서명한 정책합의문의 ‘핵개발 의혹 해소 전 현금지원 중단 고려’ 대목을 상기시키며 진의파악을 지시했다는 후문이다. 또 같은 날 마지막 TV합동토론에서 노 후보가 “교육문제는 철학이다. 양보 안한다”며 노-정 정책공조를 무효화하는 듯한 발언을 한 데 대해서도 정 대표는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는 것.
특히 같은 날 노 후보가 통합21의 핵심당직자와 만나 “대통령이 되면 당 개혁위원회를 구성해 완전히 새로운 당을 만들겠다”고 말한 것을 전해듣고 정 대표측은 노 후보가 대선 승리 이후 ‘개혁세력’의 헤게모니를 확보하기 위한 구상을 마쳤다고 판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다 노 후보가 17일 한 인터넷 신문 인터뷰에서 “단일화 이후 협력관계에 대해서는 생각도 못했는데 정 대표가 ‘선거기간 중 협력’을 내걸기에 거절하기 어려워 ‘선거협력이야 할 수 있다’고 승낙했다” “구속받을 만한 어떤 약속도 하지 않았다”는 등 국정공동운영 약속을 일축한 것도 정 대표측을 자극했다는 후문이다.
평소 “공조에서 중요한 것은 신뢰”라고 말해온 정 대표는 18일 저녁 종로4가 음식점과 자택에서 당직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통음(痛飮)하며 깊은 ‘배신감’을 토로했다는 후문이다.
▽성격론〓이 같은 상황요인 못지않게 권력의 현실적 속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정 대표의 ‘결벽증’과 불확실성을 못 참는 기업가적 성향이 더 큰 요인이라는 분석도 있다.
정 대표는 “단일화는 대국민 약속이므로 이를 파기하는 것은 정치적 자살행위”라는 상당수 당직자들의 만류에 “안될 줄 알면서 공조한다고 계속 떠드는 것이야말로 국민을 속이는 것”이라고 고개를 가로저었다고 한다.
한 측근은 “단일화 승복이라는 역사적 기록은 정 대표의 5년 뒤 ‘꿈’을 위해 버릴 수 없는 자산이다. 일반적인 정치인이라면 이를 지키는 데 연연할 것이다. 그러나 정 대표는 (금이 간 공조를 지키는 것이) 원칙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판단되면 과감히 버리는 성격”이라고 말했다. 주어진 현실적 데이터들을 갖고 계산기를 두드려본 결과 ‘아니다’는 답이 나오면 명분이니 장래니 하는 불확실한 세계에 미련을 두지 않고 자리 털고 일어나는 ‘현실론자’라는 얘기다.
정 대표측 관계자들은 정책조율에 대한 정 대표의 고집스러울 정도의 집착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한다. 한 고위당직자는 “정책이야말로 정치인이 내놓는 대국민 계약서라는 게 정 대표의 인식”이라며 “이것이 하나둘씩 눈앞에서 내팽개쳐지는 것을 목도한 정 대표로서는 더 이상 집권 이후 약속들이 지켜질 것이라고 믿을 근거를 상실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음모론〓그러나 당 안팎에서는 “약속 때문에 마지못해 공조에 응했다가 노 후보측 언행을 구실 삼아 공조를 깨뜨린 것”이라는 ‘준비된 파경설’에서부터 ‘한나라당 공작설’ 및 현대가(家)의 강한 공조 포기 요구설, ‘여권 공작에 의해 단일화에 발목이 잡혔다가 의혹의 일단이 드러나자 미련없이 돌아섰다’는 설 등 각종 음모설이 난무하고 있다.
실제 일부 당직자들은 유세공조가 시작된 이후 “노 후보가 당선될 경우 정 대표는 철저히 ‘해체’ 대상이 될 것”이라는 우려를 그에게 전달하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일각에서는 이회창 후보가 18일 오후 들어 일부 비공개 여론조사에서 1∼2%포인트 앞서는 것으로 나타난 것도 정 대표의 ‘결심’을 재촉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한다. 여기에다 현대 계열사들과 정 후보의 정치적 장래를 앞세워 파상적으로 공조철회를 요구해온 한나라당측의 물밑 설득작업이 먹혀들었다는 분석도 있다.
정 대표 주변에서는 단일화 여론조사 작업에 청와대측이 개입해 결과가 노 후보쪽으로 조작됐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정 대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얘기도 있다.
▽앞으로의 행보〓정 대표의 한 측근은 “단일화 당시에도 노 후보에게 의탁해서 5년 후를 기약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집권 2인자라는) 개인적 이해를 포기하면서 어려운 결심을 내리게 된 정 대표를 국민도 점차 이해하게 될 것”이라며 “며칠간 휴식한 뒤 빈 마음으로 가까운 분들과 진로를 논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장기 외유설’이나 ‘정계은퇴설’에 대해서는 부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당직자는 “자해행위와 다름없는 이번 결정은 정치를 그만하겠다는 내심의 표현이 아니겠느냐”고 해석했다.
박성원기자 swp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