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경의 아픔을 딛고 야구를 향한 열정을 다시 불태우고 있는 조성민. 서울 강남구 도곡동의 사무실에서 업무에 몰두해 있다.강병기기자
역시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하는 것일까. 조성민(29)에게 결혼생활의 파경은 하늘이 두쪽 나는 아픔일 터. 그러나 그 일이 ‘제2의 야구인생’을 찾는 계기가 된다면 그 아픔은 새로운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자정을 넘겨서까지 계속된 취재진의 전화 공세와 정신적 허탈감에 육신은 파김치가 된 상태였지만 19일 아침 조성민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평온했다. 결혼생활은 파경을 맞았지만 그동안 애써 외면해온 야구에의 열정을 되찾게 된 때문이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신문에 난 자신의 기사를 꼼꼼이 읽어보고 “아들 환희를 최진실이 키우게 하겠다는 일부 보도는 잘못된 것이다. 환희 만큼은 절대 포기할 수 없다”고 언성을 높인 그가 불쑥 내뱉은 말은 야구 복귀의 꿈.
“모든 걸 잊고 다음달 미국으로 건너갈 겁니다. 거기서 팔꿈치와 무릎 치료를 병행하면서 몸을 만들 계획입니다. 다행히 수술은 다시 안해도 된다고 하더군요.”
조성민이 밝힌 청사진은 메이저리그에 도전하는 것. 이를 위해 그는 최희섭(시카고 컵스)의 에이전트로 평소 친하게 지내는 이치훈씨에게 이미 도움을 요청해놨다.
“돈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임창용은 삼성에 소속된 선수로 거액의 이적료가 메이저리그행의 걸림돌이었지만 자유계약선수인 저는 계약금을 한푼도 못받아도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조성민은 메이저리그행이 여의치 않을 경우 국내프로야구에서 못다 이룬 야구에의 꿈을 피워볼 생각이라고 입술을 깨물었다.
고려대 시절 92학번 동기생인 연세대 임선동(현대), 한양대 박찬호(텍사스 레인저스), 경희대 손경수(전 두산)를 능가하는 최고 투수로 각광을 받은 조성민은 96년 계약금 1억5000만엔(약 15억원)을 받고 일본 최고의 명문구단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던 유망주.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악몽같은 부상의 연속 뿐이었다.
데뷔 3년째인 98년에는 전반기에만 7승을 올리며 올스타에 선정되는 투혼을 불태우기도 했지만 바로 그 올스타전에서 불의의 팔꿈치 부상을 당했다. 조성민은 이후 수술과 재기를 다람쥐 챗바퀴처럼 오가다 지난 8월 계약기간이 1년여 남은 상태에서 은퇴했다.
조성민은 귀국한 뒤 서울 강남구 도곡동에 사무실을 연 뒤 목동 현대백화점 지하와 강남역 부근에 C&C 컴퍼니란 빵집을 내고 사업가로 변신했다. 그러나 야구에의 미련을 미처 버리지 못한듯 사무실 벽을 요미우리 시절의 모습이 담긴 대형 판넬과 자신이 끼었던 글러브로 장식했다.
장환수기자 zangpabo@donga.com
◇조성민은…
△95년 10월1일〓요미우리 자이언츠와 8년간 계약금 1억5000만엔, 연봉 1200만 엔에 입 단 계약
△98년 7월23일〓일본프로야구 올스타전에서 오른쪽 팔꿈치 통증을 당해 이틀후 등록 말 소(7승6패 평균자책 2.75)
△98년 9월17일〓2군 합류와 재활훈련
△99년 4월1일〓미국 로스앤젤레스 센치넬라병원에서 프랭크 조브 박사의 집도로 오른쪽 팔꿈치의 손상된 인대 이식과 뒤쪽 뼈을 깎아내는 대수술을 받음
△99년 11월28일〓톱 탤런트 최진실과의 교제 사실 처음으로 고백
△2000년 5월21일〓1년 10개월만에 1군 복귀
△2000년 6월1일〓일본에서 결혼 공식발표
△2000년 12월5일〓서울 하얏트호텔에서 결혼
△2001년 8월3일〓아들 환희 출산
△2002년 5월15일〓야쿠르트전에서 감격의 첫 승 거뒀지만 다시 팔꿈치와 무릎 통증 재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