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오후 노무현 후보의 승리가 확실시되자 고향인 경남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 주민들이 기뻐하며 만세를 부르고 있다. 최재호기자 choijh92l@donga.com
옛날 봉화(峰火)를 올리던 봉화산 정상 ‘사자바위’ 주변 하늘이 노랗게 물들었다. 누군가 “달이 떠오른다”고 외쳤고 주민들은 일제히 “노무현 대통령”을 외쳤다. 잠시 후 보름 하루 지난 둥근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19일 노무현(盧武鉉) 대통령당선자의 고향인 경남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 오후 10시 노 후보의 당선이 확정되자 이 마을 주민 45가구 125명은 박수와 함께 일제히 함성을 내질렀다. “이겼다.”
마을회관 앞뜰에 모인 주민들은 징과 꽹과리를 울리는 농악대에 섞여 어깨춤을 췄고 가슴 졸이며 TV를 지켜보던 일부 주민들은 서로 부둥켜안은 채 눈시울을 붉혔다. 오전 일찍부터 국밥과 갖은 음식을 만들어 손님 대접에 한창이던 마을 부녀자 10여명도 마을회관 주방에서 뛰쳐나와 주민들과 어깨춤을 췄다.
출구조사 발표 후 한동안 집에서 TV를 지켜보다 나온 노 당선자의 형 건평(盧健平·60)씨는 수척한 모습으로 “어젯밤 정몽준(鄭夢準) 국민통합21 대표의 지지철회 선언으로 밤새 잠을 설쳤는데…. 장하다. 훌륭한 대통령이 되길 바란다”는 소감을 밝힌 뒤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노 당선자의 진영중학교 후배라는 주민 박영재(朴英在·49)씨는 “선배님은 청렴한 정치를 할 것입니다”라며 목소리를 높였고 출구조사 발표 직후 이웃마을에서 달려왔다는 정영벽(鄭永碧·54)씨는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걱정을 많이 했지만 믿고 왔다”며 활짝 웃었다.
이들에겐 천당과 지옥을 오가며 가슴 졸인 24시간이었다. 이날 오전까지만 해도 주민들은 정 대표의 지지 철회 소식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노건평씨는 전날 밤늦도록 술잔을 비우며 잠을 설쳤다고 말했다. 이날 하루종일 긴장 속에 보낸 주민들은 오후 6시 방송사의 출구조사 결과가 일제히 노 후보의 승리를 예측하자 비로소 환호를 터뜨리며 원기를 되찾았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개표가 진행되면서 이회창(李會昌) 후보가 리드하자 마을회관 앞뜰엔 깊은 침묵이 드리워졌다. 일부 주민들은 “속이 타 들어간다”며 연방 술잔을 들이켰다. 이후로는 시소게임. 주민들은 시시각각 바뀌는 중간집계 결과에 탄성과 한숨을 교차하며 TV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오후 8시40분경. 노 후보의 역전이 시작되면서 마을회관 앞뜰엔 다시 징과 꽹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민들의 함성도 갈수록 높아졌다. 이후 이어진 잔치 분위기는 자정을 넘기도록 식을 줄 몰랐다.
노 당선자의 형수 민미영(閔美迎·46)씨는 “삼촌(노 당선자)이 모든 면에서 국민이 바라는 대통령이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대통령 임기가 끝날 때까지 여기서 하던 대로 농사만 짓고 살 겁니다”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동생들과 이른 아침 서울에서 투표를 하고 고향에 온 장조카 지연(志姸)씨도 “작은아버지가 국민과 함께 하는 대통령이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만삭의 몸으로 하루종일 손님 대접을 한 주민 서휘정씨(32)는 “태어날 우리 아기도 노 당선자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면 좋겠다”며 활짝 웃었고 주민 백창업씨(51)는 “손님 대접을 위해 어제 마을 곗돈 50만원으로 진영읍에서 돼지 2마리분의 고기를 사왔다”며 “우리 마을뿐 아니라 김해, 경남, 아니 전 국민의 경사”라고 소리쳤다.
주민들은 대통령의 고향이라고 해서 ‘특혜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단호히 거부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마을 이장 이용희(李龍熙·51)씨는 “대통령 고향이라서 무얼 기대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감격만으로도 만족한다”고 말했다. 노 당선자의 모교인 진영 대창초등학교와 진영중학교도 별도의 행사를 마련하지 않았다.
진영〓강정훈기자 manman@donga.com
배극인기자 bae215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