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는 역사를 어떻게 만들었는가/브라이언 페이건 지음 윤성옥 옮김/372쪽 1만5000원 중심
“서리가 점점 심해진다. 런던시내 템스강 복판에 노점상이 가득 찬다. … 바다는 얼음에 꽉 잠겼다. 어떤 배도 드나들 수 없다.”
영국 작가 존 에블린이 1684년 1월24일 쓴 일기다. 1692년 프랑스에서는 봄이 되었지만 너무 추워 나무에 새싹이 돋지 않았다고 한다. ‘겨울 같은 여름’이 17세기 후반 수십년 동안 유럽을 휩쓸었다.
중세 ‘해적활동’의 폭발적 증가는 유럽을 휩쓴 냉해의 영향으로 분석되기도 한다. 바이킹 활동을 묘사한 상상도./동아일보 자료사진
흥미롭게도 ‘겨울 같은 여름’이라는 표현은 같은 시기의 조선왕조실록에도 등장한다. 1684년 음력 4월6일자 실록을 펼쳐보면 ‘(초여름인데) 경상도 안음, 전라도 무주, 강원도 영월, 평안도 박천 등 전국적으로 눈과 우박이 내렸다’고 적혀 있다. 2년 후인 1686년 음력 4월1일자는 더욱 심각한 어조다. ‘전국에서 눈이 내려 춥기가 한겨울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실록은 추위와 기근, 그리고 이어지는 전염병과 흉흉한 민심의 동향을 연이어 보고하고 있다.
기후는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다. 방대한 사료 더미 속에서 의미 있는 사건들을 찾아낸 역사가들은,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 했듯이 사료에서 추출된 연대기적 사실과 정치적 사건들, 문화적 흐름 등을 일단의 인과관계 속에 배열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거대한 장치들이 활용되는데, 기술 기후 지리 인구 전염병 등이 그러한 항목이다. 물론 이 밖에 역사를 만드는 요소란 인간을 포함하여 너무나도 다양하고 복잡하다. 또한 신중한 역사가라면 이 중 어느 하나의 요인을 ‘결정적’으로 강조하지도 않을 것이다.
미국 샌타 바버라대 고고학과 교수인 저자는 해박한 고고학 혹은 역사 지식을 문학적으로 심지어 대중적으로도 잘 풀어내는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학문의 대중화, 그리고 상업화 열풍의 첨단에 서 있는 인물인 셈인데, 그렇다고 해서 학문적 완성도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양자를 적절하게 잘 소화해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과거의 기후는 어떻게 알아낼 수 있을까. 고기후 연구자들은 역사적 문헌을 비롯하여 수백년 된 나무의 나이테, 빙핵이나 빙하의 이동, 화산 폭발, 포도 수확기와 수확량의 변화 등 기후의 흔적이 남겨 놓은 다양한 자료를 동원하여 과거의 기후를 예측한다. 저자는 이렇게 연구된 과거의 기후를 역사 서술의 중요 요소로 도입했다. 그가 그려내는 1300년에서 1850년 사이의 유럽사는 널리 알려진 그것과는 자못 다른 해석을 담고 있다. 일반적으로 암흑으로 묘사되는 중세사회가 오히려 따뜻한 기후로 풍요를 누렸으며, 17세기 중반 이후 춥고 변덕스러운 기후 변화로 유럽은 재앙의 나락으로 던져졌다는 것이다. 누누이 언급하고 있지만 환경결정론적인 역사 해석은 피하고 있다.
기후학자도, 서양사학자도 아닌 평자는 일전에 원서로 이 책을 접했던 적이 있다. 당시 적잖게 당황한 적이 있었는데, 생소한 서양사 연대기와 고기후학 용어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번에는 역자의 고생 덕분에 쉽게 한글로 다시 읽을 수 있어 좋았지만, 조금 더 친절한 주석을 붙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김호 서울대 규장각 책임연구원·한국과학기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