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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열규 교수의 웃음의 인생학]사형수의 농담

입력 | 2002-12-25 18:38:00


프랑스 혁명의 무서운 소용돌이에서도 유머는 피어났다. 혁명이란 것이 아수라장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실존주의 철학자인 가브리엘 마르셀은 혁명은 대개가 난장판이고 허구고 악몽이라고까지 잘라서 말했다. 그의 조국 프랑스의 7월 혁명도 그의 눈에는 다를 바 없었다.

한데 거기서 근사한 유머가 생겨났다. 그건 혁명이 조금은 누명을 벗게 될지도 모를 그럴듯한 농이고 웃음이다.

기요틴에 올라서기 직전, 혁명파의 괴수 로베스피에르가 말했다.

“여보, 사형 집형관 나으리. 나 마지막으로 우리 동지들과 얼굴 좀 맞대고 포옹하고 싶소.”

담당자가 고개를 가로젓자, 사형수가 말을 이었다.

“아니 이미 목이 잘린 채, 저 땅바닥의 머리들은 저렇게 서로 맞대고들 있는데 살아 있는 우리들은 왜 안 되지?”

이 농 한마디, 보통 사람은 어림도 없다. 죽음 앞에서 요동도 하지 않고서야 비로소 할 수 있는 농이다. 기지가 번쩍이고 있다. 삶의 마지막 위기 앞에서도 도량은 한없이 넓다.

이건 유머의 진수다. 죽음을 웃음으로 대하는 마음의 여유면 연옥 아니라 지옥에 가서도 천당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남의 것만 아니라 우리 유머도 찾아보자.

옛날 노인들이 모여서들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 얘기 저 얘기 하다가 화제가 동이 났다. 다들 무연(憮然)히 수염만 만지고 있는데 좌장 격인 한 노인이 입을 열었다.

“여보게들 이제 우리도 세상 하직할 준비들을 해야지. 그래서 내 묻겠소만 죽음의 세계가 얼마나 좋은 곳인지 알기들 하는가?”

다들 어이가 없었다. 한사람이 투덜댔다. “그래 할 말이 없으면 입이나 닫고 있지!”

“저럴 수가?” 핀잔을 물리치듯이 좌장이 입을 뗐다.

“하고많은 사람 죽고는 저승 갔지. 한데 돌아오는 사람 단 한 사람이라도 보았던가? 그 세계가 얼마나 좋으면 다들 안 돌아오겠나.”

이건 미리 자신의 수의(壽衣)와 관을 손수 장만해둔 노인다운 명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