캉유웨이의 옛집 옆에는 홍콩 화교인 질녀의 기부금으로 조성된 화려한 연못이 있다. 난하이〓김형찬기자 khc@donga.com
뛰어난 고전학자이자 개혁사상가인 캉유웨이(康有爲·1858∼1927)의 명성을 익히 듣고 있던 열일곱 살의 량치차오(梁啓超·1873∼1929)는 과거에 낙방해 고향인 광둥성(廣東省) 난하이(南海)에 내려와 있던 그를 찾아갔다. 캉유웨이는 량치차오의 권유로 학생들을 위해 만목초당(萬木草堂)에서 강의를 시작했고, 량치차오는 “캉유웨이를 만난 후 비로소 평생 동안 해야 할 학문이 무엇인지를 알게 됐다”고 말했다.
청나라 말기의 개혁운동이었던 변법자강(變法自疆)운동을 이끌었던 두 주역은 이렇게 만났다. 캉유웨이의 고향 난하이는 광저우(廣州)의 바로 서남쪽에 위치했고 량치차오의 고향은 난하이 남쪽의 신후이(新會)였다. 중국의 남쪽바다와 맞닿으며 홍콩과 마카오를 마주보고 있는 이 지역은 일찍부터 외래문물이 활발하게 넘나드는 곳이었다. 이 때문에 중국의 공산화 이후에도 광저우를 중심으로 일찍부터 자본주의적 문화가 유입돼서 도시지역은 현재서울 이상의 소비수준을 이루고 있다. 이곳에서는 보통화(普通話·베이징 표준어)를 사용하는 베이징 출신의 ‘촌놈’들이 기를 펴지 못한다.
난하이에 있는 캉유웨이의 옛집은 그 앞의 캉유웨이기념관과 함께 깔끔하게 정돈돼 있다. 그런데 그 옆에 연꽃으로 가득 찬 연못과 그 위를 굽이굽이 뒤덮고 있는 화려한 대리석 교각들, 그리고 번쩍이는 정자들은 이를 압도한다. 홍콩에 사는 캉유웨이 조카딸의 기부금으로 꾸며놨다는 이 호화스런 연못은 주변의 집들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지만, 동네 사람들의 여유로운 휴식처가 되며 이곳에서 나름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화교자본의 힘을 보여준다.
량치차오는 이곳에 머물던 캉유웨이에게서 주자학과 양명학과 불교, 그리고 공자의 유학을 주로 정치이론으로 해석하는 공양학(公羊學)과 서양으로부터 유입된 다양한 학문을 배우며 그를 따랐다. 캉유웨이는 량치차오가 찾아오기 6년 전인 스물여섯살(1884)에 이미 그의 대표작인 ‘대동서(大同書)’를 완성했다. 이 책은 ‘예기(禮記)’의 ‘예운편(禮運篇)’에 묘사된 유가의 이상사회를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의 삼세설(三世說)과 결합시키고 그 실현 방법을 서술한 것이었다. 즉, 정의롭고 평화스러운 사회란 어떤 것이고 이를 이룩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어떤 것인가를 제시한 것이다.
량치차오의 옛집 앞에 세워진 그의 동상과 그 뒤에 있는 화려한 유럽풍의 기념관.신후이〓김형찬기자 khc@donga.com
박애와 평등을 기초로 국가와 가족의 폐쇄성을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의 혁신적 대동사회론은 한편으로는 당시 중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줬지만 또 한편으로는 중국의 전통과 서구적 근대를 뒤섞은 비현실적 타협안에 불과하다며 비판을 받기도 했다.
캉유웨이와 량치차오는 청일전쟁 직후인 1895년 베이징에서 정치결사인 강학회(强學會)를 만들고 정치개혁을 주장하는 일간지도 발행하며 개혁파 관료와 지식인들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나아가 청일전쟁에서의 패배와 제국주의 열강들의 득세로 중국의 위기를 절감하는 지식인들을 모아 정치 및 교육 개혁을 중심으로 사회전반의 제도 개혁을 추진하는 변법개혁을 시도했다. 이들은 개혁의 필요를 느끼던 광서제(光緖帝)의 지원을 받았지만 서태후(西太后)를 중심으로 한 보수파의 반격으로 백 일만에 해외로 망명하게 되고 일본 유럽 캐나다 등을 돌아다니며 근대국가의 모습을 직접 목격한다. 그러나 이들은 중국인들이 민주적 정치제도를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지 않다고 생각했기에 입헌군주제라는 한계를 넘어설 수 없었다. 이미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 왕조는 막을 내리고 중화민국이 건국되지만, 1917년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신임을 받던 장쉰(張勳)이 쫓겨난 11세의 소년 푸이(溥儀)를 황제로 재옹립하려 시도하자 캉유웨이는 관복을 입고 자금성으로 달려갔다.
이들은 한 때 급변하는 시대를 앞서갔고 조선의 지식인들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줬지만 ‘근대’라는 시간의 흐름은 이들보다도 더 빨랐다.
시간은 지금도 변함 없이 흐르고, 동네 사람들은 캉유웨이 옛집의 연못 못지 않게 화려하게 꾸며진 유럽풍의 량치차오기념관 앞 나무 그들 아래서 한가롭게 바람을 쏘이고 있었다.철학박사 kh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