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띠 직장인들이 모여 새해 소망과 덕담을 나누고 있다. 왼쪽부터 윤훈기(36) 정병호(48) 이혜진(24)씨.안철민기자
코오롱정보통신 홍보인사실 정병호 상무보(48)는 작년에 경사가 겹쳤다. LGIBM에서 회사를 옮기며 ‘별’(이사)을 달았고 이사가 된 지 6개월 만에 상무보로 승진했다. 평수를 늘려 새 집으로 옮겼고 수능시험을 치른 작은 딸은 우수한 성적으로 ‘가’군 대학에 합격했다.
제일기획 제작본부 윤훈기 차장(36)은 지난해 ‘직장생활 벌써 10년째구나’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의 고민을 알아챘는지, 회사는 윤씨를 유난히 달달 볶았다. 외국어연수원에 ‘입소’시켜 놓고 100일 밤낮을 영어만 쓰며 살게 했고, ‘더욱 감각적으로, 더욱 젊게’를 요구하며 더욱 많은 일을 맡겼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제 11년차.
국민카드 e비즈팀 이혜진씨(24)는 부모님을 따라 중 2 때부터 프랑스 싱가포르 등 주로 외국에서 생활했다. 미국 미시간대에서 심리학을 전공하고 작년 2월 귀국, 진로를 고민하다가 “그래도 여자가 일하기에는 금융권이 최고다”는 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국민카드에 입사했다. 입사 7개월차.
“올해는 나의 해”를 외치는 이들 양띠 ‘띠동갑’ 직장인. 띠는 같지만 각자 다른 높이의 ‘인생 계단’에서 서로 다른 고민을 하며 자신의 해를 맞았다.
▽정병호 상무보〓다들 뜻 깊은 새해를 맞았습니다. 저는 작년엔 회사, 집을 옮기고 딸은 학교를 옮겼지요. 좋든 나쁘든 ‘변화’에 적응하는 게 보통 어려운 게 아닙니다.
▽윤훈기 차장〓작년에 쉰 한숨만큼 내가 뒤처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재기발랄한 후배들이 치고 올라오는데 정말 무서웠습니다. 연수원에 가 있는 동안 영어도 배우고 헬스클럽에서 살도 뺀 게 새롭게 결의를 다지는 데 도움이 됐습니다.
▽이혜진씨〓한국문화에 익숙하지 않아 고생했습니다. 과장님한테 ‘저기 윤충섭씨가 그러는데요…’라고 말을 꺼냈더니 과장님이 ‘윤충섭씨가 댁 친굽니까?’ 그러시더라고요. ‘씨’는 동기나 후배에게, 선임자는 ‘선배’로 깍듯이 불러야 하는 줄 그때 처음 알았어요.
▽정〓제 업무는 신 인사제도를 만드는 일입니다. 많은 기업이 성과중심의 신 인사제도를 실시하는데, 코오롱정보통신도 예외는 아니지요. 오랫동안 외국기업에 근무한 제 경험이 좋은 인사제도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게 회사의 판단입니다. 변화에 적응하는 것보다 변화를 만드는 일이 훨씬 힘들군요.
▽윤〓저희 회사는 7년 전부터 신 인사제도를 적용하고 있습니다.
▽이〓저희도 곧 시작한대요. 군대 갔다온 남자에게 어쩔 수 없이 뒤처지는 여자 입장에서는 좋을 수도 있는 제도라고 생각해요.
▽윤〓어떻게 더 좋은 광고를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다 보면 회사 내 서열이나 연봉에 신경 쓸 시간이 없습니다. 물론 ‘뒤처지면 큰일 나겠구나’, 위기감이 생기는 효과는 있었습니다.
▽정〓집에 돈이 많으면 직장에 목을 맬 필요는 없겠지요. 직장생활은 일이 재미있거나, 돈을 벌기 위해 합니다. 대충 시간을 때워서 월급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이제 없습니다. 최선을 다 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받는 게 당연하지요.▽윤〓저는 노래방에서 노래책을 뒤부터 넘깁니다. 대개 첫 페이지에 원하는 노래가 있었는데, 요즘은 점점 넘기는 장 수가 많아집니다. 세월이 ‘끼’를 훔쳐가는 것 같습니다.
▽정〓 저는 제 머리칼이 희다고 얘기 안 합니다. 부분염색하다가 염색약이 번졌다고 하지요. 랩은 자신 없지만 성시경 포지션 노래 정도는 악을 쓰고 외웁니다.
▽이〓두 분 노래하는 모습 보면 여직원들 반하겠어요. 사모님이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요.
▽윤〓저 미혼인데요. 양띠는 늦게 결혼 하는 게 좋답니다. 하지만 올해에는 꼭 결혼을 하겠습니다. 띠동갑(12세 연하를 의미)도 좋아요.▽정〓저희 부부는 동갑입니다. 1980년 결혼 전 서울 무교동 낙지집에서 식사를 하는데 지나가던 웬 스님이 “둘은 78세에 함께 죽겠어”라고 말하더군요. 너무 행복했습니다. 부부가 같이 죽을 수 있다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이 있을까요. 스님의 예언을 지키는 게 저의 매년 소망입니다. 담배는 물론 안 피우고, 요즘처럼 회사에서 스트레스 많이 받는 일을 할 때는 성당에 가서 기도를 하며 마음의 안정을 찾습니다.
▽윤〓 상무님 연세가 되면 신문 부음란에 친구 이름도 보이겠어요.
▽정〓벌써 몇 년 전부터 1년에 2, 3차례 친구 사진 앞에 향을 꽂습니다. 이혜진 윤훈기씨도 젊을 때부터 건강관리 시작해야 합니다.
▽이〓저도 새해에는 자기계발 못지않게 운동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윤〓저는 미혼인데 몸매는 기혼입니다. 총각으로서 경쟁력을 더욱 상실하고 있지요. 일 몸매 노래 건강, 올해는 모든 면에서 ‘남 광고’뿐 아니라 ‘내 광고’를 열심히 해서 반드시 장가 가겠습니다.
진행·정리〓나성엽기자cpu@donga.com
▼가계부 주름살 펴져라▼
새해엔 물가가 안정돼 기분 좋게 가계부를 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필리핀 주재원이던 남편을 따라 해외생활을 하다가 지난해 귀국했는데 살림살이에 돈이 너무 많이 들어 힘듭니다.
지난해에는 주변에서 경제가 불안하다는 소리를 많이 하니까 돈 쓰기가 겁났습니다. 남편도 사업하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지요. 불안한 마음에 무조건 아끼고 모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양띠해인 올해는 경제상황이 좋아져서 아이들을 데리고 예전에 살던 필리핀에 다시 가볼 수 있을 정도의 여유가 생겼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아이들 사교육비 걱정도 할 필요가 없기를 희망해봅니다. 14세, 8세가 되는 두 아들의 피아노와 합기도 학원, 유치원비 등만 합해도 한 달에 80만원이 넘게 들었거든요. 아이들이 배우고 싶어하는 것도 많지만 다른 부분 지출 때문에 영어학원 등은 그만두게 했습니다. 앞으로 교육비가 더 늘어날 텐데 이 문제를 고민하지 않고도 아이들을 잘 키울 수 있으면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가계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또 무언가 일을 하고 싶어 한 가전회사의 주부 모니터 요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모니터 일을 하면서 기업의 활동과 제품에도 세심한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아직 우리나라 기업들은 서비스 정신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진정 소비자를 배려한 서비스를 받고 질좋은 제품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었으면 합니다.
장성이(40세. 주부. 경기도 수원시)
▼취업문 화~알짝 열려▼
새해에는 원하는 직장을 구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소비자 상담 분야에서 일을 하고 싶어 지난해 3월부터 취업을 준비해 왔지만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인터넷 취업사이트와 각 기업의 채용 정보를 뒤지고 원서도 많이 밀어넣었지만 쉽지 않더군요.
친구들의 표정도 우울합니다. “그래도 어딘가에 일자리는 있겠지”라며 취업준비를 시작했던 친구들이 결국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푼돈이라도 벌어야 한다며 원하지 않는 직종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경제가 살아나서 젊은이들이 일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마음껏 실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고 싶습니다. 올해는 ‘사회에 뭔가 필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갖고 친구들과 함께 웃는 한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힘들어하시는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올해는 풍요로운 한해가 되기를…. 거제도의 한 조선회사에서 일하시는 아버지는 컴퓨터도 못하시고 고학력도 아니어서 승진이 어려웠습니다. 파업 때도 고생하셨습니다. 젊은 세대에 밀리면서 그 나이에 공장 기계를 돌리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고 눈물이 날 뻔한 적도 있죠.
각 세대와 각 분야의 사람들이 서로 돕고 보완하면서 함께 살 수 있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모두가 넉넉히 살 수 있도록 기업들이 쑥쑥 성장하기를 기대해 봅니다.
백경희(23세. 인제대 아동학과 4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