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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현의 테마 여행]‘잉카의 사라진 도시’ 마추픽추

입력 | 2003-01-02 17:23:00

공중도시 마추픽추의 모습. 빈틈없이 맞물린 돌담, 관개수로, 정교한 계단식밭 등 잉카인들이 남긴 흔적은 그들이 높은 수준의 문화를 갖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사진제공 라틴코리아


태양신의 후예, 잉카인들을 찾아서

페루의 마추픽추(Machu Picchu)

토머스 모어의 소설, ‘유토피아’. 이 말은 원래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아무 데도 없는 나라’라는 뜻이다. ‘엘도라도’도 이상향을 가리키지만 그 뜻은 사뭇 다르다. 엘도라도는 스페인어로 황금의 땅.

16세기엔 유럽의 탐험가들이 전부 이 엘도라도를 찾기 위한 탐험행렬에 가담했다. 그중 몇몇은 신대륙을, 또 몇몇은 바다 위의 섬들을 발견했다. 1511년 파나마에 정착한 에스파냐인들 사이에는 이상한 소문이 떠돌았다. 파나마 지협 남쪽으로 며칠만 항해하면 황금이 많은 나라에 닿는다는 것이었다. 태평양의 발견자인 에스파냐의 탐험가 누네스 데 발보아는 이 소식을 듣고 도전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꿈은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소문을 듣고 남쪽으로 탐험을 계속했고 황금 보기를 돌처럼 하는 황금의 나라 찾기에 혈안이 되었다. 바로, 위대한 잉카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 1911년 美고고학자가 발견

1911년 6월 미국의 고고학자 히럼 빙엄이 이끄는 탐험대는 사라져버린 도시를 찾아 나섰다. 1532년 황금을 좇아 페루를 찾았던 탐욕스러운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와는 그 목적이 달랐다.

스페인의 국왕에게서 ‘기독교 포교’라는 십자군적인 사명을 받아 도착했지만 실질적으로는 금을 찾아 엘도라도로 왔던 피사로. 그는 당시의 잉카 황제 아타후알파를 처형하고 잉카제국을 철저히 파괴했다. 빙엄의 원래 목적은 대살육에서 도망쳐 나온 잉카의 후예들이 세운 도시, 비트코스와 빌카밤바를 찾는 것이었다. 이 두 곳이 마지막 잉카의 왕인 망코와 그의 아들들이 1572년까지 에스파냐에 저항하던 최후의 거점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쿠스코의 중심인 아르마스 광장 옆의 대성당 . 인디오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재래장터에서는 꿀 , 전통 수공예품이 주 거래 품목이다 . 페루의 인디오들이 원색의 전통의상을 입고 쿠스코 거리를 걷고 있다 . 잉카인들의 건축기술을 엿볼 수 있는 돌담 . 스페인 식민지 시대에 건설된 이 돌담은 쿠스코를 강타한 지진도 견뎌냈다 .(사진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사진제공 주한 페루대사관

빙엄이 망코의 도시를 찾기 위해 탐험길에 오른 최초의 인물은 아니었지만 가장 행운아였음은 분명하다. 마추픽추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1911년 7월. 아마존의 용광로 같은 불볕더위 속에 사람 키를 넘는 숲과 날카로운 협곡을 지나 길 아닌 길을 넘어 힘겹게 도착한 곳이 바로 해발 4570m의 마추픽추다. 빙엄은 이곳이 망코의 수도 빌카밤바라고 믿었다.

마추픽추는 마치 하늘에 붕 뜬 것처럼 보이는 공중도시다. 잉카의 원래 수도인 쿠스코지역과 차단된 것은 물론 우기에는 통과할 수조차 없는 골짜기가 가로막고 있다. 빙엄이 쓴 ‘잉카의 사라진 도시’(1948)에는 이런 묘사가 있다.

‘외로운 봉우리가 접근을 허용치 않겠다는 듯 절벽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온통 바위투성이 절벽이었다. 그 절벽들 위로는 구름을 거느리고 눈 덮인 산들이 수천 길 위로 솟아 있었다.’

산 위에서는 계곡이 다 내려다보이지만 계곡에서는 어디에서 올려다보아도 보이지 않는 요새. 바위산 꼭대기에 있으면서도 자급자족이 가능한 도시. 도시 절반이 경사면에 세워져 있고 유적 주위는 성벽으로 견고하게 둘러싸여 완전한 요새의 모양을 갖추고 있다. 당시 이 곳에서 생활하던 사람은 1만명 정도. 학자들은 많은 사람들이 먹을 식량을 대기 위해 계단식 밭이 필수적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주요 작물은 옥수수였다. 전문적인 식견을 가진 학자가 아니더라도 이들이 계단식 밭에 물을 끌어들인 방법과 고랑을 파낸 지하용 수로, 나무를 도려내어 수관을 만들거나 했던 당시의 과학적인 농경 기술엔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누가 이런 곳에 도시를 건설했을까? 그 무모함이 놀라울 뿐이다. 도시엔 거대한 바위들이 빈틈없이 완벽하게 맞물려서 잉카인들의 뛰어난 건축술을 보여준다. 그처럼 큰 바위들을 바퀴나 도르래도 없이 어떻게 옮기고 들어 올렸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오늘날에는 광장 옆에 태양신에게 바쳐진 듯한 둥그런 사원과 해시계인 인티우아타나만 남아 몇몇 집들과 함께 여행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이 유적지가 발견된 때는 마침 페루가 독립국이 된 지 한 세기가 지나던 시점이었다. 다른 신생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처럼 정체성 찾기에 골몰하던 페루인들에게 마추픽추의 발견은 ‘잉카제국이 페루의 상징’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했다. 동시에 페루 지식인 사회에 퍼져 나가던 네오 잉카 열풍을 절정으로 치닫게 했다.

빙엄이 탐험대를 끌고 출발한 고대 잉카 제국의 수도, 쿠스코는 케추아어로 ‘배꼽’을 의미한다. 태양신을 숭배한 잉카 제국의 인디오들은 쿠스코가 세계의 중심,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다.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비행기로 한 시간 정도면 날아갈 수 있는 쿠스코는 표고 3360m의 고산지대다. 심장이 약한 사람은 이곳에서 그냥 주저앉거나 쓰러진다. 공기밀도가 매우 낮아 숨쉬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중심지역은 아르마스 광장(Plaza de Armas)이고 이곳에 대성당이 있다. 쿠스코의 관광명소는 대부분 광장 주변에 모여 있고 호텔들도 광장에서 도보로 접근 가능한 거리에 있다. 100년 넘게 걸려 지었다는 대성당은 잉카의 비라코차 신전 터에 세운 것이다. 은을 무려 300t이나 사용해서 만든 중앙 제단은 그 화려함에 넋을 잃을 정도이다. 지붕에는 남미에서 가장 큰 종이 있고 메스티소 출신의 화가인 마르코스 사파타가 그린 ‘최후의 만찬’도 다른 종교화들과 함께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자신의 건축물들을 대부분 잉카의 신전과 궁전 위에 건설했다. 태양신전인 코리칸차 위에 산토 도밍고 교회를 세웠고, 태양 처녀의 집 위엔 산타 카타리나 수도원을, 와이나 카파쿠 궁전 자리엔 라 콤파냐 헤수스 교회를 세웠다. 신전과 궁전에 있던 엄청난 황금을 약탈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처럼 신전을 파괴하고 건물을 세운 정복자들의 횡포는 수차례에 걸쳐 대가를 치렀다. 1650, 1950, 1986년 쿠스코를 강타한 대지진에 스페인 사람들이 세운 대부분의 건축물은 파손되었지만 잉카의 돌 구조물들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쿠스코인들은 지금도 잉카의 흔적 아래서 살아간다. 안데네스로 불리는 옛날 잉카방식의 계단밭, 잉카의 다리나 터널, 관개용 수로 등은 지금도 근교 마을에서 사용하고 있다. 매년 6월말에 열리는 태양 축제인 ‘인티라이미’ 역시 잉카 제국을 기념하는 것이다. 브라질의 리우 카니발, 볼리비아의 오르로 축제와 함께 남미의 3대 축제로 꼽히는 이 행사는 쿠스코 전역을 달군다. 주 무대는 쿠스코 근교의 유적 사크사이와만이다. 잉카의 후예인 쿠스코 사람들은 그 해에 수확한 옥수수로 만든 술 ‘치차’를 황금병에 넣어서 태양에 바친다. 사라져버렸다고 생각되는 잉카는 아직도 그렇게 사람들 생활 속에 숨쉬고 있다.

여행칼럼니스트 nolja@worldpr.co.kr

새의 모습으로 추정되는 나스카의 지상 회화 . 누가 언제 어떤 용도로 만들었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다 ./사진제공 라틴코리아

▼나스카 지상회화 ‘비행 관람’▼

페루여행에서 나스카 지상회화를 빼놓을 수는 없다. 페루해안에서 80㎞ 정도 떨어진 건조지대에 있는 이 지상회화는 100년부터 800년 무렵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직선, 삼각형의 도형과 동물, 물고기, 식물 등의 대형 그림인 이 흔적들은 나스카 문화를 상징한다.

신비로운 나스카 지상회화는 비행사들에 의해 어렴풋이 그 존재가 알려졌지만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1939년 롱아일랜드 대학의 교수인 폴 코소크 때문이었다. 그가 천문학과 고대 관개수로의 전문가로 처음 나스카를 찾을 때는 그 연구를 위해서였다. 그러나 코소크 교수는 곧 광대한 평원(팜파)에 새겨진 줄들이 단순한 유적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하고 비행기를 빌려 하늘에서 내려다본 후 일단의 그림인 것을 알아냈다.

코소크 교수의 뒤를 이어 독일 출신의 평범한 여성이 나스카 그림 연구에 평생을 바쳤다. 그의 이름은 마리아 라이헤. 과외선생이 되기 위해 페루에 왔던 그는 코소크 교수의 영향으로 호기심과 의무감에 이끌려 나스카 지상회화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역시 코소크 교수처럼 이 그림들이 일종의 천문 캘린더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정확히 측량하고 보존하는 데 생을 바쳤다. 50을 넘긴 나이에도 헬리콥터에 매달려 평원을 날고 사진을 찍었으며 끊임없이 제도하고 측량했다. 이 그림의 보존을 위해 사막 끝 고속도로(판아메리칸고속도로) 주변에 전망대를 세워 사람들이 무료로 관람할 수 있도록 했고, 그림의 보호를 위해 꾸준히 운동을 펼쳐 세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나스카 지상회화는 이 지역에 오랜 세월 동안 거의 비가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까지 남아 있게 됐다고 한다. 누가, 언제, 무슨 이유에서 그런 그림을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수수께끼다. 그림의 크기는 10m부터 300m에 이르고 숫자는 200개 정도이다.

지상회화 전부를 돌아보기 위해서는 비행기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유람 비행은 리마에서 사전예약도 가능하지만 현지에서 흥정한 후에 타는 게 더 실속있다. 다만, 요금이 일정치 않고 2배 가까이 차이가 나서 비행기가 신형인지, 소요시간이 얼마인지(통상 40분 전후), 멀미약이나 음료 서비스가 되는지를 따져보는 게 좋다. 기상조건이 가장 좋은 시간은 대개 햇빛이 비스듬히 비추는 오전이다. 오후엔 모래바람이 불어서 제대로 아래를 내려다볼 수 없다. 수도인 리마에서 나스카까지는 비행기로 1시간20분 정도 걸린다.

● 여행정보

1. 찾아가는 길

우리나라에서 페루까지는 미국을 경유지로 삼아 로스앤젤레스나 애틀랜타에서 이동하는 방법이 있다. 로스앤젤레스에서는 란칠레항공(02-775-1500, 로스앤젤레스∼리마구간은 매일 출발편이 있으며 소요시간은 8시간20분), 애틀랜타에서는 델타항공(02-754-1921)이 리마까지 연결된다. 로스앤젤레스에는 오전 도착이어서 당일에 리마행 비행기로 갈아타는 것이 가능하다. 리마에서 마추픽추까지는 헬기투어 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다.

2.나스카 관광

나스카 유적을 둘러보는 유람비행은 공항이용료(2달러)를 포함, 50달러 정도면 적당하다. 지상회화를 살펴볼 수 있는 전망대인 미라도는 시내에서 20㎞ 정도 떨어져 있다. 지상회화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금지돼 있다. 리마에서 비행기를 빌려 유람 비행에 참여할 수도 있다. 오전 9시30분쯤 출발해서 오전 11시에 나스카에 도착, 45분 유람한 후 나스카 시내와 근교의 유적 등을 견학하고 오후 5시쯤 돌아오는 일정이다. 소형 유람비행기 여행요금은 130달러 안팎이다.

페루 관광정보는 인터넷 정보사이트(peru.com)와 주한 페루 대사관(www.peruemb.or.kr·02-793-5810)에서 얻을 수 있다. 나스카 유적과 마추픽추 같은 핵심 관광코스를 포함한 중남미 상품가격은 중남미 전문 여행사들이 겨울 성수기에 내놓는 상품들을 기준으로 할 때 399만(12박13일 소요)∼699만원(18박19일) 선이다. 라틴코리아 02-7777-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