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사 비머.토드 비머의 생전 모습(박스).사진제공 토드비머재단
리사 비머(34)는 지난 1년 무척이나 바쁘게 살았다. 2002년 1월 딸 모건이 태어났고 9월에는 몇달 동안 준비했던 책을 펴냈다. 9월엔 장남 데이비드(4)가 유아원에 들어갔다. 둘째아들 앤드루(2)에게 챙겨줄 일도 늘어만 간다.
남편 이름을 딴 ‘토드 비머 재단’ 일은 계속 됐다. 래리 킹 라이브, 오프라 쇼, 굿모닝 아메리카…. 미국에서 유명한 TV 쇼에는 거의 다 출연했다. 전국 각지에서 열린 강연과 기자회견은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리사는 ‘9·11 테러’ 때 남편 토드(당시 33세)를 잃었다. 그런 사람이 조용히 살지 왜 TV에는 그리 나오느냐고? 리사는 대답한다. “1, 2주일간은 그런 일도 내가 해줘야죠. 저는 곧바로 일상으로 돌아갈 겁니다.”
대학 동창인 토드와 리사는 1994년 결혼해 뉴저지주 크랜버리에 살았다. 토드는 컴퓨터 소프트웨어 회사인 오라클의 세일즈 매니저로 일했다. 2001년 9월11일 아침 뉴저지 뉴워크 공항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가기 위해 유나이티드 항공기에 올랐다. 운명의 UA93편이었다.
비행기가 테러범에 납치된 직후 그는 기내 전화기로 지상의 교환원과 통화해 이날 뉴욕에서 벌어진 테러 상황을 전해들었다. 살아날 가능성은 없었다. 토드는 주변의 다른 승객들과 힘을 합해 테러범들에 대항했다. 뜨거운 물을 가득 채운 커피포트, 음식 나르는 카트, 조그만 빵칼 등이 그들의 무기였다. 워싱턴의 어딘가를 향해 가던 피랍기는 펜실베이니아주의 벌판에 떨어졌고 생존자는 없었다.
토드가 다른 승객들에게 “자, 여러분, 준비가 됐으면 결행합시다(Let’s roll)”라고 한 말은 교환원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리사가 토드를 비롯한 UA93기 승객들의 용감한 저항을 자세히 그려낸 책 ‘레츠 롤’의 제목은 거기서 나온 것이다. 토드는 비행기에서 리사에게 전화를 걸려다가 그만두었다. 당시 임신 5개월이던 리사는 자신이 충격받지 않도록 토드가 배려했다는 것을 안다.
리사의 삶은 이내 달라졌다. 언론과 의회의 관심이 쏠렸고 전국 각지의 후원이 답지했다. 리사는 2억달러에 이르는 후원금을 모아 재단(www.beamerfoundation.org)을 설립했다. 기부를 받아 프린스턴에 사무실도 마련했다. 책 기념품 등 판매수익금이 합쳐져 재단기금도 크게 불어났다. 재단 사업은 비극을 당해 부모를 잃은 어린이들을 돕는 일. 심리치료 등 사업을 올 봄부터 본격화한다. 리사는 올해 더 바쁘게 살게될 것이다.
테러 한달 후, 비행기 타기를 겁내는 일반인들 앞에 나타난 리사는 토드와 똑같은 코스의 비행기 여행을 해보였다. “테러리즘의 포로가 돼선 안 된다”는 것이 당시 그의 말이었다. 이처럼 ‘강한 여인’ 리사가 가장 소중히 생각하는 것은 일상(日常)이다. 거창하게 치러진 ‘9·11’ 1주년 기념식에 그는 나가지 않았다. 데이비드가 유아원에 가는 둘째날이기 때문. 리사는 “그 날은 데이비드를 돌보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을 토드도 이해할 것”이라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9월11일은 많은 사람에게 기념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저에겐 매일이 기념일이에요.”
리사는 TV에 출연해 “고교시절 한 교사의 말에서 일상의 중요성을 배웠다”고 전했다.
“남편을 잃은 지 일주일 된 여교사가 수업을 마치기 직전 학생들에게 말했어요. ‘공부와는 관계없지만 아주 중요한 이야기란다.’ 눈물 고인 눈으로 이렇게 들려주었어요. ‘나와 약속을 하자. 학교에 오갈 때 뭔가 아름다운 것을 찾아보기로. 냄새나 소리, 산들바람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도 좋다. 이 세상의 작은 것들, 우리가 당연시해왔던 것들, 모두 사라질 수 있는 것들, 이런 것을 알아보는 것이 아주 중요하단다.’ 교실은 정적에 휩싸였어요. 그날 오후부터 나는 전에 보지 못한 새로운 것을 많이 느꼈답니다.”
리사는 각박한 세상을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슬픔에 잠겨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오늘 점심시간에 본 것들의 특별한 의미를 느껴보세요. 하고 싶은 것을 해보세요. 우리가 가끔 후회하는 것은 우리가 한 것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하지 않은 것 때문이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