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난 지 갓 한 달된 딸아이를 돌보느라 새해 맞는 것도 잊었다. 늦게 본 딸이라서 그런지 눈을 떼기 힘들 만큼 귀엽고 사랑스럽다. 이름을 짓는 데도 근 한 달 가까이 고민했다. 그만큼 애정이 가는 것이다.
아직 머리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눈맞추기도 쉽지 않은 갓난아이이지만 이 어린 딸과 함께 자랄 나라 모습을 생각하다 보면 희망과 걱정이 교차한다. 물론 어린 학생들이 남의 나라 장갑차에 치이고도 말 한마디 변변히 하지 못하는 그런 나라는 결코 아닐 것이라 믿는다. 또 전쟁 없는 나라, 평화로운 나라이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학교 붕괴, 입시 지옥, 취업대란 등등의 말들도 옛날이야기가 된, 그런 나라가 되길 진정으로 바란다.
▼´차이´ 존중해야 ´차별´ 없어▼
그러나 내 딸과 함께 자랄 나라는 무엇보다도 ‘차이’가 존중되는 나라였으면 좋겠다. 차이가 존중된다는 것은 곧 성숙한 사회의 표징이다. 차이가 가치인 시대다. 그러나 이제껏 우리는 차이를 존중하기는커녕 그것을 인정하는 것 자체를 꺼리다 못해 두려워해왔다. 아니 차이가 곧 차별의 근거가 되는 그런 사회였다. 출신 지역, 출신 학교, 성별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보이게, 또 보이지 않게 차별이 있었다.
대선이 끝나고 새해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지역 감정과 세대 갈등의 찌꺼기들로 어수선한 것도 결국 그 속을 들여다보면 차이가 존중되지 못하고 오히려 그 차이가 또 다른 차별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차별과 역차별의 악순환 고리를 끊지 못한 채 지역 감정은 아직도 근원 치유가 요원해 보인다. 여기에 변화의 주역인양 등장한 2030세대와 노령화사회로 접어들면서 직장과 사회, 심지어 가정에서마저 소외되고 외면된 5060세대, 그리고 중간에 낀 40대와 아예 잊혀져 버린 7080세대 등 세대간의 복잡다기한 갈등마저 더해져 우리 사회의 갈등 구조는 점점 더 비틀려서 꼬여 가는 것이 아닌가 걱정된다.
어디 그뿐인가.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이른바 ‘말 되는 사람들끼리’만 모여야 말한다. 어느 모임에서건 그 모임의 속성이 파악되지 않는 한, 여간해선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어 버렸다. 이것 역시 구태여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기보다는 차라리 속 편하게 끼리끼리만의 울타리치기를 택한 요즘 세태의 한 단면이다. 결국 차이가 존중되지 못하면 소통도 없는 것이다.
이 점에선 지식인 사회도, 언론도 예외가 아니다. 말이 좋아 진보, 보수이지 엄밀히 말하자면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집단들간의 패싸움과 다를 바 없는 형국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어른들이 이러니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어른들은 ‘외면’하고 아이들은 ‘왕따’시킨다. 결국 이 모든 갈등의 찌꺼기들을 쓸어내자면 무엇보다도 차이의 가치를 인정할 줄 아는 열린 마음이 요청된다. 차이가 존중될 뿐만 아니라 그 차이에서 가치가 나온다는 사실이 진정으로 인정될 때 우리나라는 정말 달라질 것이다.
또 내 딸과 함께 자랄 나라는 ‘변화’를 하되 지역이든 세대든 함께 ‘윈-윈’할 수 있는 나라였으면 좋겠다. 함께 ‘윈-윈’할 수 있는 변화를 위해서는 변화를 이끄는 사람들이 변화를 따라가야 하는 사람들의 심정과 처지를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변화를 이끄는 것도 쉽지 않지만 변화를 따라가는 것도 결코 간단치 않다. 변화를 따라가는 일은 자기 그림자 밟기나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쫓아갔다 싶으면 저만치 가버린 자기 그림자처럼 잡히지 않는 것을 잡으려고 애쓰는 매우 피곤한 일이다.
▼모두 만족하는 변화 추구해야▼
사실 변화와는 뒤엉켜 놀아야 신명도 나고 성과도 날 터인데 변화를 좇기만 하다 보면 어느새 변화는 귀찮다 못해 원수 같은 것이 되고 만다. 친구가 아닌 원수처럼 되어버린 변화에 대해서는 반발과 반동이 고개를 들기 마련이다. 그러니 주눅 들게 하는 변화가 아니라 즐거운 변화, 소수만 앞장서는 변화가 아니라 함께 할 수 있는 변화, 강요된 느낌의 변화가 아니라 기꺼이 동참할 수 있는 변화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내 딸과 함께 자랄 나라가 요구하는 새로운 리더십의 요체다.
정진홍 한국종합예술학교 교수·객원논설위원 atombit@net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