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대기업 마케팅 사업부의 윤현수 대리. 올해 과장 승진을 앞둔 그는 이달 초부터 사내 토익 강의를 듣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강의 신청을 위해 사내 교육 프로그램에 접속한 김 대리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올해부터 토익 강의가 없어진 것. 토익은 업무영어 실력을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교육팀의 설명이었다.
내친 김에 영어회화 프로그램에 도전하기로 한 김 대리는 다시 한번 놀랐다. 일정 수준 출석을 하지 못하면 다시는 프로그램을 들을 수 없도록 관련 규정이 강화돼 있었다. 업무 성격상 지방 출장이 잦은 그로서는 이것도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에게 남은 유일한 방안은 한 달에 7만∼9만원씩 내고 외부 영어학원에 다니는 것. 지난해부터 외부 교육에 대한 지원이 없어졌기 때문에 학원비는 전액 그가 부담해야 한다.
▽영어교육 ‘구조조정’=기업들의 영어교육이 바뀌고 있다. 2∼3년 전만 해도 토익, 회화, 독해, 작문, 청취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무료로 운영해 왔던 기업들은 업무능력 향상에 도움이 되는 분야를 중심으로 통폐합하는 ‘구조조정’에 나서고 있다. 교육 방식도 사내위탁 강의와 외부학습 지원을 병행하던 것에서 벗어나 양자택일 구조로 전환하고 있다. 과거 영어교육이 직원들에게 다양한 기회를 주는 데 치중했다면 최근에는 규모를 줄이는 대신 집중도를 높이는 방식으로 변모하고 있다.
영어교육 구조조정은 영어의 필요성이 큰 주한 외국기업들이 앞장서고 있다.
97년 삼성중공업 중장비 부문을 인수한 볼보건설기계코리아는 80주 수료시 1인당 600만∼700만원을 전액 지원하는 최고급 사내 영어강의를 실시하고 있다. 영어회의가 많은 반면 영어 승진시험이 없는 이 회사는 토익 강의를 없애고 완전 회화 위주로 재구성했다. 교육 효과를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해 회화 한 반의 구성원을 4명으로 제한하고 중도에 교육을 포기하는 직원에게는 향후 2년 동안 재수강 신청 기회를 박탈했다.
삼성물산도 몇 년 전부터 외부교육 지원을 없애는 대신 사내 프로그램을 내실화했다. 회화, 토익, 온라인 강의 등 크게 3가지로 나눠진 이 회사의 사내 영어교육은 중도 포기자에게는 수강료 전부 또는 일부를 물어내도록 요구하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한국오라클은 사내 영어강의를 모두 없애고 외부교육 지원에 주력하는 경우. 영어 학원을 다니는 직원에게는 연 170만원 한도 내에서 지원한다. 회사는 사내에 대규모 토익, 토플 강의를 개설하기보다는 외부학원 수강을 유도하는 방식으로 직원들의 교육 요구를 수용하고 있다.
▽영어 인재를 뽑는다=기업들은 영어교육에 ‘선택과 집중’의 원칙이 확산되는 것에 대해 직원들의 영어능력이 높아진 만큼 과거와 같은 백화점식 영어교육의 필요성은 줄어들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지난해 국내기업 처음으로 신입사원 대상 영어 프리젠테이션 시험을 실시한 삼성물산 인사팀의 최기호 과장은 “최근 1∼2년 동안 신입사원 대부분의 토익점수가 900점을 넘는다”며 “영어실력이 뛰어난 직원들이 늘어난 만큼 영어교육의 밀도를 높이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정부투자기관인 KOTRA도 2000년 신입사원 선발에 영어회화 시험이 추가되면서 교육 프로그램을 회화 위주로 바꿨다. KOTRA 교육팀 관계자는 “업무능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 아래 토익과 독해 강좌를 폐지했다“면서 “회화수업 중도 포기자에게는 수강료에 상당하는 금액을 급여에서 공제하고 인사고과에도 반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늘어나는 중국어 수요=앞으로 기업들의 중국어 수요가 급증하면 영어교육의 구조조정은 더욱 가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기업들이 앞다퉈 중국 전문가 양성에 나서면서 교육 프로그램에서 중국어는 영어를 빠르게 위협하고 있다. 지난해 삼성SDI가 전사원을 대상으로 중국어를 가르치겠다고 선언한 데 이어 LG SK 계열사들도 속속 중국어 사내 강좌를 개설하고 있다.
삼성, 현대-기아자동차 등 40여개 국내기업의 사내 영어교육을 위탁받아 운영하는 미국계 벌리츠 영어학원의 이계은 원장은 “기업 영어교육이 과거 직원들에게 ‘떠먹여 주던 방식’에서 벗어나 ‘따라올 사람에게만 집중 혜택을 주는 방식’으로 변하고 있다”면서 “영어교육에도 기업들의 내실경영이 자리잡아 가고 있다”고 말했다.
정미경기자 micke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