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빈 메타판(1972년·왼쪽)과 카라얀판(1982년)
말초적이며 찰나적인 사랑이란 현대인만의 것인가. 아니, 사랑이란 본디 눈길 하나로 ‘게임 오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옛 베이징을 무대로 한 푸치니 오페라 ‘투란도트’에서도 그렇다.
망명한 북방의 왕자 칼라프는 투란도트 공주를 단 한번 바라보고 넋이 나가 생명을 건 수수께끼에 도전한다. 맞추면 부마(駙馬)요, 틀리면 죽음이다. 그에게 지순한 사랑을 바치는 시녀 리우도 단지 그가 ‘옛날, 한번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아 주었다’는 이유만으로 목숨까지 버린다. 오히려 악녀 투란도트 공주의 사랑이 가장 ‘합리적’일 지도 모르겠다. 최소한 칼라프의 과감성에 압도되는 데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매력적인 줄거리만이 이 작품의 인기비결은 아니다. ‘식객’을 비롯한 음식만화 장르의 어투를 흉내내볼까. “동양적 취향을 가미한 아름다운 선율, 화려하고 효과적인 관현악법, 장엄하고 신비한 합창, 구성의 묘(妙)가 어울려 참을 수 없이 풍부한 맛을 내고 있다….”
이 작품의 명반 대결은 유니버설사의 ‘내전’이다. 아날로그로는 1972년 녹음된 데카사의 음반, 디지털로는 1982년 DG사의 음반 등 두 대표반이 모두 오늘날 유니버설사의 것.
각 팀의 라인업은 어마어마하다. 데카팀은 지휘 주빈 메타, 칼라프 루치아노 파바로티, 투란도트 조안 서덜랜드, 리우 몽세라 카바예. DG팀은 지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칼라프 플라시도 도밍고, 투란도트 카티아 리치아렐리, 리우 바버라 헨드릭스. 면면만으로 각각 당대의 드림팀이라기에 부족함이 없다. 승부를 결정짓는 것은 데카팀 주공격수 파바로티의 황홀한 개인기. 아리아 ‘잠들지 말라’ 마지막, 먼 새벽 하늘로 사라지는 빛나는 B음은 ‘높은 V’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다. 여기에 비하면 DG팀 도밍고는 베스트 컨디션이 아니다.
게임을 볼만하게 만드는 것은 DG팀 사령탑 카라얀의 지휘봉이 빚어내는 마법. 1막 투란도트 공주의 등장, 리우의 죽음 등 극적인 장면마다 그의 절묘한 완급조절이 숨을 멈추게 한다.
투란도트역은? 데카팀 서덜랜드의 판정승. 리우역은? 한치의 양보 없는 호화로운 열연 끝에 역시 데카팀 카바예의 약(弱) 판정승. 카라얀 감독은 최선을 다했으나 히딩크의 말처럼 ‘감독이 골을 넣을 수는 없다’.
올해 4월, 서울 상암 월드컵 경기장에서는 장이머우 감독판 ‘투란도트’ 야외공연이 펼쳐진다. 같은 달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는 국립오페라단의 ‘투란도트’가 맞불을 놓는다. 잔인한 달, 잔인한 공주와 용감한 왕자의 한판승부가 베이징에서 황사바람을 타고 와 서울을 뒤덮을 것이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