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 있는 에로비디오 제작’을 표방해온 공자관 감독.신석교기자
《‘촛불시위’를 소재로 한 비디오용(6㎜) 에로영화가 최근 영상물등급위원회(이하 영등위)로부터 등급보류 판정을 받아 현재로서는 사실상 배포가 불가능해졌다. ㈜클릭영화사가 만든 ‘태극기를 꽂으며’란 제목의 이 영화는 독립운동가의 자손인 호스트바 종업원 ‘태극기’가 우연히 여중생 사망 추모 촛불시위를 접하고 격분, 조국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주한미군 사령관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아내를 자신의 성 노예로 만든다는 내용의 코믹에로. 영화사는 ‘깃발을 꽂으며’로 제목을 바꾸고 주인공이 미국여인들과 성관계할 때 입은 태극기 팬티의 건곤감리 부분을 모자이크 처리하는 등 영등위의 지적에 따라 일부 내용을 수정, 2일 등급분류를 재신청했으나 또다시 등급보류 판정이 내려졌다. 영등위 배평호 비디오부장은 “성인 에로비디오
제목에 태극기를 사용한 것은 국민정서에 맞지 않으며 외교관계와 특정 개인의 명예를 훼손할 소지가 크다”고 밝혔다. 이 영화를 연출한 공자관 감독(28)을 3일 만났다.》
기자〓정치적 사안을 에로에 접목시키면 상업적으로도 ‘먹히겠다’고 생각했나?
감독〓남녀가 눈만 마주치면 바로 다음 베드신이 등장하는 기계적 에로를 탈피하는 게 내 영화 세계다. 불륜도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에로 영화가 살려면 사회적 이슈와 맥락을 흡수해야 한다.
기자〓리얼리티가 살아 숨쉬는 에로 말인가?
감독〓다른 에로영화와 달리 내 작품에서는 애무 장면이 길다. 에로영화 감독들은 음모나 음부가 보이지 않게 찍으려다 보니까 삽입 장면을 선호한다. 아랫배를 맞대고 있으면 어떤 앵글로 찍어도 금지 부분이 잘 드러나지 않으니까. 그러나 삽입 못지않게 현실 세계를 지배하는 건 애무 아닌가.
기자〓현실세계….
감독〓에로 감독들은 편당 8∼12개의 베드신을 찍는다. 정상위, 후배위, 측배위…. 찍다보면 종국엔 현실이 아닌 에로영화 자체의 문법과 진화 논리에 빠져 각종 서커스 포즈가 등장한다. 이는 변화를 위한 변화일 뿐이다. 나는 기본 체위를 쓰되 변화무쌍한 앵글로 잡거나 행위 중인 남녀의 얼굴을 화면 분할로 동시에 보여주는 미학적 실험을 통해 리얼리티를 재현한다.
기자〓촛불시위는 그래도 무겁다. 독립영화나 의식 있는 35㎜ 영화에 더 적합하지 않을까?
감독〓에로영화는 2, 3일이면 촬영한다. 제작비도 2000만원 정도다. 기획부터 출시까지 보름이면 된다. ‘게릴라성’이 에로의 무기다. 국민정서를 그때그때 반영할 수 있다.
단국대 연극영화과 95학번인 공 감독은 작년 7월 감독 데뷔 이후 △3류 남자배우가 톱클래스 여배우를 이용해 신분상승을 꾀하는 ‘야망’ △착탈식 성기를 가진 남자가 초인적 성능력을 발휘하다가 결국 남근 콤플렉스에 시달리게 되는 ‘만덕이의 보물상자’ △신비체험 이후 남성에게만 예쁘게 보이게 된 못생긴 여자의 애환을 그린 ‘이쁜이’ 등의 작품을 통해 ‘의식 있는 에로’를 추구해왔다고 밝혔다.
기자〓영화에는 “여기는 우리 땅, 주한 미군 몰아내자”는 구호를 외치는 시위 장면이 그대로 담겨 있다. 주인공은 “난 양키가 싫어요. 공산당보다도…” 하고 말한다. 과연 국민정서라고 생각하나?
감독〓이번에 놀랐다. 촬영하던 12월 초만 해도 촛불시위가 칭송되는 분위기였다. 대선 후 비디오 출시가 임박하자 분위기가 급변했다. (촛불시위의) 반미 성격이 짙어지면서 정부 부처를 비롯한 여기저기서 영화사에 ‘태클’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대선 전 출시되었다면 지금 같았을까?
기자〓태극기 팬티를 입은 주인공이 쇠사슬에 묶인 채 주한미군에게 채찍으로 맞는다. 주인공이 “양키 고 홈” “퍼킹 아메리카” “대∼한민국 짝짝짝짝짝”을 외치며 그 리듬에 맞춰 주한미군 사령관 부인 등 미국여성과 관계를 한다. 이건 리얼리티가 아닌데….
감독〓에로영화는 일종의 판타지다. 그래서 그런 ‘바운싱(bouncing·튀어오름)’이 가능하다. 참 이상하다. 사람들은 ‘에로영화는 싸구려’라고 한다. 그러면서 ‘저질’을 벗어나려 하면 ‘에로영화가 무슨…’ 한다. ‘대∼한민국’은 배우의 애드리브였다.
기자〓태극기 팬티는 국가 모독 아닌지….
감독〓월드컵 때 등장한 태극기 브래지어는 왜 놔뒀나. 1만원권이 그려진 팬티도 있는데, 이건 세종대왕 모독인가. 나는 한국이 개인주의와 민주주의가 살아있는 줄 알았다. 이렇게 국가주의적인지 몰랐다. 에로비디오는 어둠의 자식인가?
기자〓주한미군 사령관 부인 ‘성조기’ 역은 얼굴에 검은칠을 하고 흑인 가발을 쓴 한국 여배우가 맡았다. 또 다른 미국 여성인 ‘안줄리나’도 싸구려 금발 가발을 뒤집어쓴 한국인이다. 그들의 설정이나 영어 발음이 ‘의식’을 반영하기엔 유치한 것 아닌지….
감독〓이발소 그림이 주는 느낌이랄까, 키치(Kitsch)적인 효과를 의도했다. 일부러 유치하고 B급인 체하는…. ‘안줄리나’가 ‘태극기’와의 성교 중 게거품을 뿜으며 기절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배우들은 전례없이 진지했다.
기자〓‘안줄리나’가 ‘한국 남자에 관심 없다’는 뜻으로 “I’m not interesting Korea guy”하고 말하는 등 브로큰 잉글리시가 난무한다. 이것도 키치인가?
감독〓정식 취업비자를 가진 러시아 여성과 나이지리아 남성을 섭외했었다. 그러나 촬영 당일 “상반신만 벗는 줄 알았다”며 베드신 촬영을 거부해 긴급히 한국 배우들을 섭외했다. ‘이럴 바엔 키치로 가자’며 선회했다. 대부분 첫 출연이다 보니 영어가 대본대로 안 됐다.
기자〓주한미군사령관 부인을 흑인으로 설정한 까닭은? 장갑차 여중생 치사사건에 관련된 미군은 백인이었다.
감독〓해당 여배우가 몸매는 되는데 얼굴이 백인보다는 다소 흑인에 가까웠다. 여건에 맞추다보니 흑인가발을 씌웠다. 미리 말하지 않았는가. 너무 심각하게 보지 말라고.
‘귀족주의 에로’를 표방하며 1999년 혜성처럼 등장한 ㈜클릭영화사는 조그맣고 오밀조밀하고 여대생 분위기가 나는 이규영 하소연 등 청순 섹시스타를 발굴하면서 에로비디오계에 지각변동을 가져왔다고 에로비디오 전문가 김남훈씨는 분석했다. ‘이천년’ ‘불타는 혜성남녀’ ‘욕정의 웨딩드레스’ ‘언톨드스토리’ 등의 작품을 통해 ‘남녀가 왜 섹스를 하게 됐는지’에 대한 동기설정에 주목하며 탄탄한 내러티브 구조를 갖춘 것이 성공 요인이라는 것. 이후 각종 ‘부인 시리즈’로 시장을 석권하던 유호프로덕션의 1강 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고 전문가들은 본다.
기자〓영화 시작 10분이 넘도록 정사 장면이 없다. 에로 영화로서는 모험 아닌가?
감독〓아직도 에로비디오는 빨리감기로 보면서 정사장면만 골라보는 고객이 절반 이상이다. 그러나 드라마가 강하려면 ‘태극기’의 죽은 아버지가 촛불시위 현장에 환영으로 나타나 “나라를 위해 거대한 기둥이 되라 했거늘 아직도 그 기둥을 다른 데다 쓰느냐. 차라리 읍참마속하라”며 격분하는 모습을 초반에 넣어야 했다. 제작자는 “진한 장면 하나를 초반으로 옮겨놓자”고 주장했지만 내가 고집했다.
기자〓작가정신의 승리….
프랑스 혁명 직전 마리 앙투아네트를 다룬 포르노그라피(그림책 소설)들이 집중적으로 등장했다. 퍼스트레이디를 ‘나의 성적 파트너’로 상상함으로써 앙시앙 레짐(구 체제)에 대한 불만과 절대권위에 대한 도전의식이 고취된 것으로 본다. 포르노그라피가 사회를 바꾼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분석이다.
감독〓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억눌린 분위기에서도 지식인들이 가명으로 많은 포르노 저작을 냈다고 한다. 성인만이 즐기는 고급 문화를 정부 부처가 나서서 막는 것을 보면 지금이 빅토리아 시대와 다를 게 뭔가.
기자〓미국이 싫은가?
감독〓큰 불만 없다. 다만 간섭하는 게 싫다. 주한미군도 고속도로 통행료와 공항 이용료를 내야 한다.
기자〓주한미군사령관 부인 ‘성조기’가 주인공 ‘태극기’와 성교 도중 ‘태극기’의 정력을 못 견뎌 베토벤의 ‘합창’이 배경음악으로 깔리는 가운데 혼절했다. 감독은 이 장면으로 ‘나라의 자존심을 되세웠다’고 했다. 그러나 ‘미국’이 오르가슴을 느꼈다고 해서 ‘한국’이 이긴 건 아니지 않나? ‘미국’을 단지 만족시켰을 뿐 아닐까?
감독〓그렇지 않다. 자존심을 건 대결이었다. 에로 비디오 소비자는 거의 100%가 남성이다. 만족시키면 이긴 것이다.
문화관광부는 “등급이 매겨지지 않은 상태에서 기자들에게 시사용 비디오를 돌린 것은 불법유통 행위”라며 영화사에 영업정지 처분을 내릴 것을 시사했다.
이에 영화사는 행정처분중지가처분 신청을 낼 것을 두고 법률회사와 협의 중이다.
공 감독은 1월 중 복제 과정에서의 실수로 성기능만 발달한 채 태어난 게으른 복제인간이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원본인간’과 한 여자를 두고 쫓고 쫓기는 긴박한 상황을 연출하는 ‘복제인간의 정사’(가제)를 출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승재기자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