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옛날 옛적, 그러니까 광장엔 최루가스가 가득하고, 돌멩이가 휙휙 날아다니던 그 시절, 청량리 모모 제과점에서 곰보빵 앞에 놓고 세상 모른 채 미팅하던 그 시절, 네가 내게 보낸 편지들 끝엔 항상 ‘J가’라고 써 있었지. 기억나니?
버젓한 이름 놔두고, 영문 이니셜 써가며 소녀 취향의 감상을 편지지 위에 왜 그토록 흩뿌렸는지, 참. 왜 갑자기 J타령이냐고?
오늘 시내 모 극장에서 80년대를 배경으로 한 한국영화 한 편을 봤거든. 김승진의 ‘스잔’과 박혜성의 경아 어쩌고 하면서 교복자율화 시대의 고교생들 얘기를 하는 청춘영화였어.
▼우스꽝스럽게 포장된 우리시대▼
난 80년대에 청춘을 보냈던 40대라 당근, 그 영화를 즐겼지. 추억의 책가방을 열어본 기분으로 키득거리며. 요즘 청춘들은 ‘바람돌이’, ‘롤라장’, ‘나이스’ 뭐 이런 만화, 공간, 운동화 상표를 몰라서 어떨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감독은 그 시대 재현에 무척이나 열심이더군.
어떤 이들은 요즘 80년대를 배경으로 만든 영화들이 붐을 이루는 것에 대해 문화적 퇴행이라고 걱정하고 있지. 나 역시 어설픈 역사적 향수는 불필요한 감상주의를 유발시키며, 이런 일련의 문화행위는 재고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중요한 건, 만든 이들이 ‘그 시대적 배경을 통해 뭘 얘기하려고 하는가’겠지.
어쨌든, 오늘 본 영화는 싸구려 감상주의에 빠지지 않고 적당히 쿨하고, 적당히 쾌활하게 80년대의 청춘들을 이야기하고 있었지. 마지막엔 그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무얼 하고 사는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끝을 맺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그들이 소위 386세대라는 쪽으로 생각이 미치더군. 그러고 보니 386세대가 인구에 유독 많이 회자되던 때에 그 세대로 불렸던 이들 중엔 이미 40대가 된 이들도 꽤 있네. 나 역시, 너 역시.
386세대는, 광주민주화운동, 군부독재, 6·10민주항쟁, 사회주의 붕괴 등의 역사적 궤적을 겪은 이들로, 정보화의 바람 속에 개인주의로 흐르는 20대보다 훨씬 적극적인 사회적 관심으로 무장하고, 이전 세대의 보수주의와 구별되는 사회비판의식을 가진 세대라고들 하지.
한국 사회의 다른 분야에서도 그랬겠지만, 난 386세대가 한국 영화계에 미친 영향력이 크다고 봐. 이른바 변화를 주도하는 세력으로서 386세대는 한국 영화계에도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으켰다고 보거든. 소위 그들이 만든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8월의 크리스마스’ ‘쉬리’ ‘반칙왕’ ‘공동경비구역 JSA’ ‘친구’ ‘소름’ 등은, 예술적 성취와 상업적 성공을 함께 거머쥐며 영화관객들에게 자국영화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주었지. 구멍가게같이 영세하던 한국영화계를 소위 산업화의 궤도에 올려놓았다고도 생각해.
너무 자화자찬이라고? 그래도 할 수 없어. 사실인 걸 뭐. 그런데 말이야, 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일련의 영화들 속에서 그 시절이 지금의 10, 20대들에겐 유희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해. 복고로 통칭되는 촌스러움과 순수의 코드가 요즘의 젊은 세대들에게 일종의 패션으로 전환되어 소비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지. 나는 오늘 그 영화를 보면서, 어느 정도 자기연민에 빠지기도 했어. 386세대는 아직 이렇게 가열차게 살아가고 있는데, 벌써 우리의 지나간 청춘이 촌스럽고 우스꽝스러운 낯선 신세계로 포장되어 요즘 젊은이들에게 읽혀지고 있다는 데서 오는 일종의 서글픔, 혹은 세대간의 간극을 느꼈다고나 할까? 너무 오버라고?
▼더 가열찬 작품 만들고 싶은데▼
386세대의 영화 만들기가, 더 가열찼으면 해. 그들만의 목소리가 제대로 담겨 있는. 그리고 그들의 영화가 한국 영화관객들로부터 더 뜨거운 반응을 얻었으면 해. 웬 조바심이냐고?
벌써 한국영화가 너무 가벼워지고 너무 어려지고 있는 느낌 안 드니?
J! 아니 진순아. 그러니까 너희 세대도 극장 와서 영화 좀 많이 봐. 가끔 비디오로 보니까 아줌마 소릴 듣지. 수요가 공급을 만드는 거야.
심재명 명필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