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퍼 에미넴. 사진제공 뉴욕타임스
“지나치게 각광받고 싶지 않다. 나의 실제 모습보다 지나치게 크게 보이고 싶지 않다.”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백인 래퍼 에미넴이 작년 말 아주 철학적인 말을 했다. 자신은 미국의 학부모들이 ‘우리 아이한테 물 들일라, 가까이 오지 마라’고 손사래를 치던 대상인데, 그런 악동(bad boy)이고 반항아인데, 자꾸만 어른 팬이 늘어만 가는 것이 위험하다는 거다. 오, 맨.
그는 요즘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북쪽 교외의 펀데일이라는 작은 도시에 있는 스튜디오에서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작년의 대 히트를 여유롭게 즐기지도 않는다. 스스로 “작년의 성공은 생각해 보지도 못했던 것”이라면서도 “뒤돌아볼 것도 아니며 나는 오직 달려가는 중”이라고 말한다. 저녁이면 스튜디오에서 멀지 않은 클린턴 타운십의 고급주택가에 있는 집에서 일곱살난 딸 헤일리와 함께 지낸다.
헤일리 때문에 딱 끊지 못했던 전 부인 킴(킴벌리 스콧)은 얼마전 집으로 돌아왔다. 이들 커플은 같이 있건 따로 있건 늘 뉴스를 만들어낸다. 에미넴은 실명을 딴 ‘킴’이란 랩에서 그녀를 죽이는 장면을 묘사하기도 했다. 2000년엔 킴이 다른 남자와 키스하는 것을 본 에미넴이 권총을 꺼내들었다가 기소돼 집행유예를 선고받기도 했다. 2년 전 킴의 자살소동 직후 둘은 이혼했다. 이들이 요즘 화해중이다. 언제 또 싸우고 헤어질지 모르지만 하여튼 지금은 그렇다. 그의 랩에서 욕을 먹은 그의 어머니나 동네 친구들의 소송도 일단락됐다.
약도 끊었다. 마약 말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가 즐겨 쓰는 ‘F자’ ‘B자’ ‘S자’ 욕을 빼면 이렇다. “늘 하던대로 약물과 파티에 빠져 살고 집안싸움이 계속됐다면 난 지금쯤 죽어있을 거야.”
수년째 그래미상, MTV상 시상식에 스폰서인 나이키의 모자를 쓰고 나가 트로피를 몇개씩 받아오고 있다. 2월 발표되는 45회 그래미상에서도 5개 부문에 후보로 올라있다. 그에게 2개의 그래미상이 준비돼 있던 1999년 “내가 어떻게 상을 받겠나” 싶어서 시상식에 가지도 않고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하고 있었던 것에 비하면 스스로의 평가도 달라진 셈이다.
작년 10월 17일로 만 30세가 된 에미넴은 이런 ‘안정과 성공’이 두려운 모양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면서 “모두 나를 사랑하면 누가 나를 미워하지?”라고 걱정한다. 역시 욕은 걸러낸 그의 설명. “아이들은 부모가 싫어하는 것에 집착한다. 자신들만이 좋아하는 그 무엇을 원한다. 나도 부모가 들었던 것(노래)은 듣고 싶지 않았다.”
반항아 에미넴은 2000년엔 미국 ‘공공의 적(public enemy)’으로 꼽히기도 했다. 그 전 해 콜로라도주 컬럼바인 고교 남학생 2명의 총기난사 사건이 터지자 의회와 언론은 이 학생들이 즐겨 듣던 마릴린 맨슨 등 록밴드들을 ‘사악한 악마의 음악’이라고 비난했다. 살인 폭력 마약 등의 단어가 난무하고 유명인사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욕설을 퍼부어대는 에미넴의 랩도 물론 비난대상이었다. 게다가 그가 자신의 표현대로 미국에서 ‘지옥에 가장 가까운’ 디트로이트의 게토(빈민굴)에서 뒹굴다 나온 ‘백인 쓰레기(white trash)’ 출신이었으니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로부터 2년 뒤 에미넴은 미국 젊은이 문화의 선두에 섰다. 심지어 미국 정부는 아랍의 젊은이들에게 미국 문화를 선전하기 위해 에미넴의 랩을 열심히 틀어대고 있다. 그가 미국 문화의 상징이 돼 ‘대사’(뉴욕 타임스 매거진의 표현) 역할까지 하는 셈이다. 지난해엔 ‘투데이’ ‘60분’ 등 TV의 주요 프로에도 출연했다.
에미넴이 미국의 학부모들에게 인정을 받는 데는 작년 11월 개봉된 자전적 영화 ‘8마일’의 영향이 컸다. 우울한 거리 8마일 로드는 디트로이트 교외에 있는 백인동네 흑인동네를 나누는 길이다. 에미넴이 어려서 살던 곳이다. 이곳에서 소외된 흑인들의 노래 랩을 하고 싶은 백인 ‘지미’(에미넴)는 찌든 생활 속에서 흑인들에게 괄시를 받아가면서도 랩 가사를 쓰고 고치는 데 정성을 다 해 결국 랩 배틀(상대방을 비꼬는 랩 시합)에서 승리한다.
유명작가 스티븐 킹은 자신의 웹사이트에 “그 친구 재미있고 똑똑하고 쇼킹하더라”고 썼다. 백인 중년 작가인 폴 슬랜스키는 “에미넴이 천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중년의 저올시다”라는 칼럼을 썼다. 뉴욕타임스의 비평가 재닛 매슬린은 영화촬영장에 가 본 뒤 “그가 젊은이 소굴에서 기어나왔다”고 표현했다. 에미넴이 작년 12월호 표지로 나온 잡지 ‘스핀’의 주필 시아 미셸은 “그가 재능이 탁월하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보수적인 학부모들조차 욕설이 난무하는 R등급(청소년은 부모 동반시 관람 가능)의 이 영화를 칭찬했다. 에미넴의 랩은 이미 미국의 문화현상이 됐다. 에미넴의 표현대로 ‘과거엔 팬이 10세부터 25세까지였는데 요즘은 5세부터 55세’로 넓어졌다.
에미넴의 성장과정은 영화보다 훨씬 참혹했다. 미주리주 캔자스시티에서 출생한 그의 본명은 마셜 매터스 3세(에미넴은 본명의 머리글자 M&M을 하나로 묶은 가명). 그가 세상에 나온 지 5개월만에 아버지는 가족을 버리고 떠나갔다. 마약중독자인 어머니는 아들을 데리고 빈 트레일러를 찾아다니는 떠돌이 생활을 했다. 1년에 학교를 여섯차례 옮겨다닌 적도 있다. 디트로이트의 흑인마을에 정착한 것은 그가 열두살 때였고 이때부터 늘 흑인들에게 얻어맞고 살았다.
만화와 TV가 그의 친구였고 랩을 해 보려던 친척 로니 필킹턴이 그의 유일한 말 상대였다. 필킹턴은 얼마 뒤 자살했고 에미넴은 왼쪽 팔뚝에 그를 추모하는 문신을 했다. 고교 중퇴후 시간당 5.5달러(약 6600원)짜리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랩에 매달렸다. 거울을 보면서 크레이지 본의 랩을 립싱크했다. “나도 랩을 할 권리가 있다”면서. 그는 훗날 “어려서 ‘차라리 흑인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고 말했을 정도로 ‘흑백차별’에 시달렸다. 1996년 24세 때 낸 첫 앨범 ‘인피니트’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나마 “백인×이 웬 랩이냐”는 혹평을 막아주는 방패가 된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몇 차례 랩을 포기하려다가 ‘내가 사랑하는 것은 오직 힙합 뿐’이라며 마음을 다잡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성공의 길이 열린 것은 1997년 로스앤젤레스의 한 방송국이 주최한 ‘랩 올림픽’이 계기가 됐다. 성적은 2위였지만 서부 갱스터랩의 거장 닥터 드레(37)가 그의 랩을 알아보았다. 에미넴이 흑인인줄 알고 연락을 취했던 닥터 드레는 어쨌든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에미넴에 대한 세간의 비판을 모두 막아냈다. 닥터 드레와 함께 작업해 2년 만에 내놓은 앨범 ‘슬림 섀디(Slim Shady·에미넴의 또 다른 가명)’로 에미넴은 마침내 스타덤에 올랐다. 에미넴은 ‘섀디’를 “내 안에 있는 악동”이라고 부른다. 사회를 향해 내키는 대로 욕을 뿌려대는 사람은 바로 ‘섀디’라고 말한다.
에미넴이 털어놓기도 했지만 ‘백인에게 호의적인 MTV’의 지원도 받아가면서 언더그라운드 래퍼가 3년 만에 미국 힙합 시장을 손에 거머쥐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상업적 성공은 작년에 특히 두드러져 앨범 ‘에미넴 쇼’는 760만장, ‘8마일’ 사운드트랙은 약 350만장 팔렸다. 그의 목걸이는 유행한 지 오래고 ‘섀디’라는 이름을 딴 청소년 의류 브랜드도 올가을 선보인다.
원하는 것 이상으로 지나치게 널리 사랑받게 된 반항아, 오, 쉿, 에미넴이 새해 어떻게 변할지 궁금하다. 오, 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