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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눈물-향수 부각…감성적 스피치 시대

입력 | 2003-01-16 17:13:00

감성을 건드리는 레토릭 구사에 뛰어난 인물로 꼽히는 탤런트 최유라,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 개그우먼 박경림(위에서부터)./동아일보 자료사진


언론학자, 국어학자들은 1997년의 외환위기를 우리 사회에 현대적 개념의 ‘스피치 문화’가 도입되기 시작한 시점으로 본다. 이후 다국적 기업들이 쏟아져 들어왔고 국내 기업문화도 글로벌화되면서 수평적 토론 토의 발표 문화가 정착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2001년 11월에는 국내 신문방송학과 교수, 중견 언론인들이 주축이 돼 ‘한국스피치커뮤니케이션학회’가 만들어졌다. 날로 수요와 공급이 늘고 있는 스피치 정립의 필요성을 인식한 때문이었다. 학회는 지난해 11월 말 학생 두 명씩 한 조가 돼 제한된 시간 내에 2 대 2 토론을 펼치는 ‘제1회 전국 대학생 아카데미식 토론대회’를 주관하기도 했다. ‘침묵은 금’임을 강조하는 유교적 사고 방식의 영향으로 스피치 문화가 제대로 자리잡을 수 없었던 한국사회에서도 스피치와 관련된 각종 트렌드들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 취업준비생부터 주부까지

최근 스피치 강좌를 찾는 사람의 다수는 여성이다. 기업의 사내교육용 스피치 강좌를 제외하고는 백화점 문화센터, 대학 내 평생교육원, 사설학원 등의 수강생 절반 이상이 여성으로 채워지고 있다. 한국스피치리더십 교육원의 손석호 원장(44)은 “1980년대 전체 스피치 교육 수요의 10∼20%를 차지하던 여성 비율이 2000년 이후 65% 이상으로 증가했다”고 말했다.

백화점 문화센터 프로그램은 주부들의 최근 관심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바로미터 역할을 한다.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 문화센터에서는 3월부터 스피치 강좌가 2개에서 4개로 늘어난다. 문화센터의 서성숙 과장은 “스피치 강좌는 수강생들이 많아 선착순 접수인 수강신청이 학기마다 일찍 마감된다고 종강 후 만족도 평가에서도 5.0 만점에 4.8 이상으로 다른 강좌에 비해 높게 나타난다”고 말했다.

롯데, 신세계 백화점 문화센터도 90년대 말부터 ‘성공화법 & 파워스피치’ ‘세치의 혀가 인생을 좌우한다’ ‘발표력 탄탄 교실’ 등 5세 이상 유아부터 성인까지 아우르는 스피치 강좌를 운영하고 있 개설해 수강생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대학에서도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스피치 교육 센터가 늘어나는 추세다. 1996년 3월 경희대 언론정보학과 허경호 교수가 국내 최초로 대학원 내에 개설한 스피치, 토론 전문과정 ‘스피치 아트 클리닉’의 수강생은 초기에는 유명 정치인 및 경제인, 고위 공무원이 대다수였지만 점차 주부 등 일반인이 많아지고 있다. 이곳에서 교육을 받은 스피치 강사들이 최근 곳곳에 스피치 학원을 차리기도 했다.

이화여대 평생교육원도 1997년 2학기부터 스피치 강좌를 개설해 재취업을 앞둔 주부, 유치원 원장, 중소기업체 사장 등 다양한 계층의 수강생을 교육하고 있다.

1 대 1 면접 시간이 길어지고 토론식 면접을 진행하는 기업이 늘어나면서 취업 준비생들이 따로 스피치학원을 다니는 경우도 많아졌다. 2002년 2월 인터넷 채용정보 사이트 휴먼피아가 1930명의 회원을 대상으로 ‘면접시 가장 중요한 요소’에 대해 설문 조사한 결과 남성 응답자 가운데 40%가 ‘말발’(1138명 중 444명)을 ‘실제 능력’(386명)보다 더 중요한 요소로 꼽았다. 여성은 능력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았지만 그 다음으로는 ‘말발’(792명 중 213명)과 ‘외모’(212명)의 중요도를 같은 수준으로 꼽았다.

‘이선미 스피치랩’의 이선미 강사(전 동아방송 아나운서, 불교방송국 편성제작국장)는 “아나운서 지망생 뿐만 아니라 방송기자 지망생 및 일반 기업에 취업하려는 학생들 사이에서도 ‘전문적인 스피치 수업을 받지 않고는 최종 면접을 뚫을 수 없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면접 대비 스피치 시장이 확대되는 추세”라고 말했다.

● 웅변학원도 스피치학원으로

길게는 50년 이상의 전통을 자랑하는 웅변학원들은 발빠르게 스피치 학원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웅변이 대중연설만을 뜻한다면 스피치는 대중연설은 물론 토론, 토의, 프레젠테이션, 대화, 손짓 눈빛 등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아우른다.

1995년 문을 연 대한언어학원은 지난해 4월 ‘대한스피치 & 리더십 센터’로, 1955년 창립된 ‘한국심리변론학원’은 1999년 ‘한국 스피치 & 리더십 교육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1961년 문을 연 ‘국제언어학원’도 2001년 ‘국제스피치언어학원’으로 개명했다. 스피치학원 원장들은 “과거 웅변학원 커리큘럼의 주 메뉴였던 대중연설법의 비중이 줄어드는 대신 재미있게 말하기, 짜임새 있게 프레젠테이션하기, 목소리에 감정 싣기 등이 강조된다”고 전했다.

1950∼80년대까지 언어장애나 소심한 성격을 치료하기 위해 화술 학원 또는 웅변 학원을 찾았던 사람들은 이제 이 분야에 특화된 상담치료기관이나 정신과 등으로 이동했다. 현재 스피치 학원생 가운데 ‘문제’를 갖고 찾아오는 사람들은 20% 미만인 것으로 추산된다.

● 시대에 따라 변한 스피치 트렌드

동아방송 부국장, KBS 아나운서실장 등을 역임한 수원대 전영우 명예교수(국어국문과·70)가 의뢰받은 스피치 관련 강의의 제목만 훑어봐도 시대별로 어떤 스피치가 주목을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는 공무원교육원 등에서 ‘브리핑법’ 강의를 의뢰했다. 노태우 대통령 시대에는 일부 대기업에서 “원탁형 회의를 도입하겠다”면서 ‘대화기법’ 강의를 맡겼다. 최근 5년간은 ‘토의 토론과 회의’ 수업을 주로 맡고 있다. 그는 스피치에서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강조되는 트렌드를 반영해 최근 ‘느낌이 좋은 대화방법’을 출간했다.

‘한국스피치커뮤니케이션학회’ 임원인 한림대 유재천 부총장(언론정보학부 교수), 서울대 추광영 교수 (언론정보학과), 광운대 임태섭 교수 (미디어영상학부), 경기대 차인태 교수(다중매체영상학부) 등은 “대통령의 정책 또는 스피치 습관, 주요 미디어의 종류와 발달 정도가 스피치 트렌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방송 매체로는 라디오가 유일했던 이승만 정권 시대 전후(1950∼60년대)에는 호흡이 길고 비장감마저 감도는 유장한 스타일의 스피치가 인기였다. 말로 모든 상황을 묘사해야 했던 방송 아나운서들의 스피치에도 복문(複文)과 만연체, 전형적인 웅변조가 많았다.

△박정희∼전두환 대통령에 이르는 군부 정권시대(1970∼80년대)는 군대식의 요약 보고형 ‘브리핑 스피치’가 꽃을 피운 때다. 대중연설에서도 짧고 힘있는 선동적인 말투가 쓰였다. TV의 등장으로 구구절절한 만연체형 설명도 필요 없어졌다.

△노태우 대통령 시대 이후 현재까지 스피치에서는 목소리, 태도, 이미지 등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 수단의 비중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첨단 미디어의 발달로 텍스트보다 비주얼의 영향력이 확대되기 때문이다.

역대 대통령들의 주요 스피치를 분석한 전영우 교수는 “노태우 대통령 이후부터 비유법을 사용한다든지 단문을 사용해 누구나 알아듣기 쉽게 만든 ‘시민형 연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김대중 대통령때는 정치 연설마저 ‘프리토크식’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 스피치가 감성화된다

‘이선미 스피치랩’의 이선미 강사는 라디오 인기 프로그램 진행자들의 음성 분석 결과를 한국화법학회지 ‘국어화법과 방송언어’(1999)에 발표했다. 연구결과 목소리톤, 호흡, 속도, 음조의 높낮이가 변화무쌍하고 다채로운 탤런트 최유라씨의 스피치가 현대 청취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스타일로 드러났다. 이 강사는 “감정을 숨김없이 나타내는 감성적인 스피치에 공감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며 “목소리, 성량 등의 조건은 열악하지만 감정 변화의 양 극단인 파안대소부터 울음까지를 순식간에 오갈 수 있는 개그우먼 박경림이나 어눌한 말투의 재일교포 가수 아유미 유의 레토릭이 최근 인기를 모으는 것도 그 예”라고 분석했다.

국제스피치언어학원 송미옥 원장은 1997년부터 스피치 강좌에 유머 수업을 추가했다. 그는 “요즘은 말만 잘 하는 스피치법을 구사하면 시기와 반감을 낳는다. 유머 수업은 감성적인 스피치를 대비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노무현 대통령당선자의 선거캠페인이 감성적인 스피치 트렌드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광고평론가 김홍탁 국장(제일기획 크리에이티브디렉터)은 “눈물과 향수(鄕愁)를 부각시켜 감성적 코드를 자극한 것이 신세대들에게 익숙한 최근 상업광고 트렌드와 맞물렸다”고 말했다.

임태섭 광운대 교수는 “포퓰리즘이 필요한 정계, 대중문화계에서는 스피치가 감성화되지만 거래, 협상, 전략 수립 등이 필요한 비즈니스 상황에서는 보다 지적이고 분석적인 스피치가 요구됨으로써 스피치 트렌드의 양극화 현상이 심화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김현진기자 brigh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