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지 시인은 알피니스트다. 알피니스트란 말은 루소가 ‘고백록’에서 알프스의 자연에 대해 쓴 것을 읽고 사람들이 비슷한 경험을 하기 위해 산을 오르기 시작한 데서 생겨났다고 한다. 그러기에 등산이라는 행위는 산 자체가 아니라 문학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라는 게 가라타니 고진의 설명이다. “시는 나의 종교이며, 산은 나의 예배당이다”라는 이향지 시인의 말에서도 시와 산의 밀접한 관계를 읽을 수 있다. 그녀는 예배당에 가듯 시를 위해 산길을 걷고 또 걸었던 것이다. 그 결과로 백두대간과 금강산에 관한 책을 냈고, 지난 해에는 ‘물이 가는 길과 바람이 가는 길’이라는 산시집(山詩集)을 묶어내기도 했다.
최근에 나온 시집 ‘내 눈앞의 전선’(천년의시작)은 물과 바람의 길이 아니라 그 산정에서 걸어 내려와 구불구불한 골목들과 거기 깃들어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리저리 뒤엉킨 전선들이야말로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나 가장 먼저 보이는 물체가 아닌가. 나무 사이로 누추하게 뻗은 전선을 바라보며 ‘전선은 나무를 흔들면서 제 불변(不變)을 흔들고, 나무는 전선을 치면서 제 불면(不眠)을 치는 것’(내 눈앞의 전선)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전선은 부도체인 나무와도 서로 흔들고 치면서 내밀한 교감을 하고 있다. 그렇게 보면 허공에 경계처럼 걸려 있는 전선(電線)은 삶의 불변과 불면을 깨우는 일종의 전선(戰線)이기도 하다.
전선을 따라가다 보면 식구들의 빨래가 널려 있는 마당이 보이고, 마당 구석에 심긴 감나무와 깊은 우물이 보인다(노파). 그리고 마흔 일곱 계단을 내려가면 큰길 옆 약국에서 ‘도무지 팔리지 않는 약병들을 혼자 지키며 / 가로수처럼 늙어가’(호생약국·好生藥局)는 아버지가 보인다. 그의 시에서 이렇게 현실과 환상이, 현재와 과거가 자주 겹치거나 뒤섞이는 것은 그 길과 계단이 기억 속으로 끝도 없이 뻗어 있기 때문이다. 그 크고 작은 기억들이 지금도 생생하게 살고 있는 집이 바로 ‘몸’이다. 따라서 이 시집은 그 몸 속에 자리잡은 수많은 ‘길’과 ‘집’에 대한 탐사의 기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산을 오르며 단련된 걸음걸이 때문인지 기억을 찾아 내려가는 말의 걸음걸이 또한 빠르고 경쾌하다. 시상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저만치 가 있어 놓치기 십상이다. 생각과 말의 그런 분방함 때문에 이향지 시인의 시를 읽다보면 예순이 넘은 생물학적 나이를 깜박 잊게 된다. 그의 시는 노파의 곰삭은 말인 동시에 한 노파 속에 들끓고 있는 수많은 처녀와 아이, 온갖 사물들의 말랑말랑한 말이다. 그 소란스러운 활력은 때로 시를 산만하거나 불투명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만큼 그가 젊고 왕성한 정신을 지녔다는 증표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특유의 활력을 잃지 않으면서도 정제된 시로 ‘둥글고 환한 구멍’ ‘바다 밖에서의 목욕’ ‘잠깐 본 항아리’ 등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늦깎이로 등단한 여성시인으로서 부단히 산을 오르고, 그 힘으로 또한 시의 변방을 외롭게 걸어온 그에게 되돌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 ‘물은 변경에서부터 끓기 시작했다’(밥으로 죽 끓이기). 이 구절처럼, 힘있게 끓어오른 그의 시가 우리의 막힌 기억을 뚫고 굳어 있는 감각을 흔들어 주기를.
나희덕 시인·조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