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일본 천황이 사는 도쿄(東京) 도심 황거 앞과 시내 고탄다(五反田)에 있는 황후의 친정 구옥(舊屋) 앞에서는 태평양전쟁 전 천황중심제를 연상케 하는 풍경이 펼쳐졌다.
이날은 천황이 전립샘암 수술을 받기 위해 도쿄대병원에 입원한 날이자 황후가 어린 시절을 지낸 친정집의 철거가 시작된 날. 궁내청이 황거 앞에 마련한 문안소에는 접수 한 시간 전부터 ‘천황 폐하의 쾌유’를 비는 시민 150여명이 줄을 서 기다렸으며 오전 중에만 500여명이 몰렸다. 이 문안소는 한달 후 천황이 퇴원할 때까지 시민의 병문안을 접수한다.
법석을 떨기는 매스컴이 더하다. 신문들은 천황이 발암 사실을 발표하도록 ‘허락’했다는 점에서 ‘과감한 결단’이라고 높이 치하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역시 암으로 사망한 선대 쇼와(昭和) 천황은 “우리 가문에 암이란 병은 있을 수 없다”며 자신의 발암 사실을 국민에게 알리지 못하게 했었다. 산케이신문은 사설에서 “국민은 무엇보다도 천황 폐하가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시기만을 바란다”며 “모두 쓸데없이 불안해하지 말고 조용히 지켜보자”고 호소했다.
한편 황후 친정집 앞에서는 “문화재로 보호해야 한다”며 철거에 반대하는 데모 행렬이 몰려드는가 하면 몇몇 주민들이 아쉬움에 눈물을 흘리는 장면도 눈에 띄었다. 이 건물은 1933년 지어진 양옥으로 상속세 대신 국가에 물납(物納)했던 것.
정부가 문화재로서 보존가치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황후 자신도 보존을 고사했는데도 주민 등 일부 그룹이 “국민에게 용기를 주는 건물”이라며 보존을 주장하고 있는 것. 이들은 철거 작업이 강행되자 17일 도쿄지방법원에 철거중지 가처분신청을 내기도 했다.
천황을 떠받드는 분위기는 일본에서 당연시된다. 메이지(明治) 천황 이후 역대 천황의 생일은 공휴일이고 주요 황족들은 생일 때마다 기자회견을 갖는다.
또 황족에 대한 기사의 문체는 극존칭을 사용한다. 아사히신문의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56%가 천황 일가에 친근감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천황은 패전 직후 맥아더 사령부 치하에서 전쟁에 대한 책임을 지고 상징적인 존재로 물러났다. 그러나 21세기 첨단시대로 접어든 지금도 국민을 강하게 지배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또 이런 광경이 북한의 김정일(金正日) 우상화와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도쿄=이영이특파원 yes202@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