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남남(南南)대립의 일부로서의 세대간 갈등…. 지난해 말의 대선에서 극명하게 부각된 유권자의 양분 현상은 종전의 지역구도에 의한 표의 동서 종단(縱斷) 이외에 연령층에 의한 표의 횡단(橫斷) 현상을 노정시켰다. 유권자의 지연(地緣)이라고 하는 공간적 차원 이외에 세대라고 하는 시간적 차원이 표의 향방에 큰 세 몰이 구실을 한 것이다.
세대간의 갈등이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있게 마련이란 점에서는 하나도 새로운 문제는 아니다. 다만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는 이러한 세대 갈등이 앞으로 노무현 정부가 극복해야 할 남남대립의 이념적 밑바닥에 똬리를 틀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념 다른 6·25 - 5·18세대▼
오늘의 동시대인을 세대별로 나눠 보는 시각은 물론 다양하다. 그러나 광복 이후 오늘날까지 한국 현대사의 전 과정을 목격 체험한 사람의 소견을 털어놓는다면 오늘을 사는 한국인은 크게 두 가지 ‘기본체험’에 의해서 그들의 정치적 이념적 정향(定向)이 영향받고 있다고 생각된다. 1950년의 6·25전쟁이 그 하나요, 그로부터 바로 30년(이른바 한 세대) 만에 일어난 1980년의 5·18 광주항쟁이 다른 하나이다.
6·25전쟁 이전까지 남한 사회의 지식층과 젊은층은 적어도 심정적으로는 상당수가 좌경화해 ‘저 산 너머’ 북녘의 공화국을 동경조차 하고 있었다.
6·25 남침전쟁으로 저 산 너머 공화국이 남한 땅에 현전(現前)하자 지식인과 젊은이들의 북에 대한 환상은 일격에 무산되어 버렸다. 반공주의의 최선의 교육은 경찰의 몽둥이도, 어머니의 눈물도 아니라 바로 공산주의의 체험이란 말이 그대로 입증된 것이다.
그 결과 6·25전쟁 이후에는 냉전시대의 세계적 상징인 이승만을 1960년 대통령의 권좌에서 축출하고서도, 또는 초기 산업화 과정의 원시적 자본 축적이 빚은 비인간적 노동 상황에 대해 1970년 전태일이 죽음으로써 항의한 분신자살 사건을 경험하고서도, 한국 사회에는 어떤 의미 있는 반미 용공의 움직임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 땅의 젊은이들 사이에 명시적 반미구호가 등장하고 친북 움직임이 꿈틀대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신군부에 의한 광주의 5·18 대학살 사건이 일어나고서부터다. 대한민국 ‘국토’의 일부에서 ‘국군’이 ‘국민’을 적대시하고 소탕전을 벌인 살육극을 본 젊은이들이 ‘국가 허무주의’에 빠졌다 해서 그게 그들의 잘못이라 하겠는가. 그러한 허무주의의 이념 공간에 반미 친북의 구호가 먹혀들어갔다 해서 놀랄 일도 아니다. 북한 인민군의 6·25 남침전쟁이 오히려 남한의 좌경이념을 약화시켜 반공 반북을 결과했다고 한다면 국군의 5·18 광주 점령은 남한의 반공이념을 약화시켜 젊은이들의 반미 친북을 조장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잘못이 젊은이에게만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문제는 오늘을 같이 사는 동시대인이 6·25 세대와 5·18 세대로 갈라지고 있다는 사실보다도 양자 사이에 유효한 사회적 대화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한 대화를 통해 한국 현대사의 전체적 문맥 속에서 6·25와 5·18을 자리매김하고 그 평가를 공유할 수 있는 작업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학문적 이론적 관심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다. 과거(過去)의 공유(共有), 과거의 의미와 해석의 공유는, 국가건 가족이건, 무릇 공동체의 성립 유지에 본질적 전제가 된다는 의미에서 매우 현실적 실천적 문제인 것이다.
▼'과거' 공유해야 갈등도 해소▼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통일에 이르기까지 서독의 여야 3당이 공동으로 정치교육센터를 세워 ‘독일현대사’의 연구 교육 계몽에 진력한 것도, 미래의 구상에 있어서는 서로가 다른 비전을 내놓고 다투더라도 과거의 평가만은 공유함으로써 젊은 공화국의 공동체적 기초를 다지자는 의도에서였다.
노무현 당선자가 지향하는 국민통합의 전제가 되는 남남갈등의 극복을 위해 세대간의 사회적 대화를 매개할 수 있는 현대사 연구를 촉구한다. 이를 위해 문민정부 때 어렵사리 탄생시켰으나 국민의 정부가 없애버린 정신문화연구원 부설 ‘현대사연구소’를 다시 살려 제대로 키워나가는 것도 고려해 봄직하다.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언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