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빛 종이(Pink Sheets)’는 연애편지가 아니다. 뉴욕에선 증권거래소에서 전자매매가 되지 않는 주식들을 위한 거래시장이란 의미다. 증권거래소와 나스닥 시장, 또는 이곳에 등록할 요건이 되지 않는 주식들을 거래하는 장외시장에도 끼지 못하는 주식들이 ‘핑크 시츠’에서 거래된다. 말 그대로 분홍빛 종이에 거래 상황이 기록돼 발행되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역사가 100년 가까이 된 이 시장에는 주당 17만5000달러짜리 주식(114년 역사의 임산물 가공회사 앤더슨-툴리)도 있고 외국계 유명회사(스위스 네슬레)도 있으니 송두리째 무시할 일은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잘 나가던 기업의 주식이 이 시장으로 자꾸 밀려온다는 데 있다. 월드컴 엔론 콘세코 글로벌크로싱 K마트 등등 1, 2년 전만 해도 떵떵거리던 기업들이 지금은 핑크 시츠에서 주당 몇 센트에 거래된다. 월드컴은 18센트, 엔론은 7센트이다.
과거엔 300여개 기업의 주식이 이 시장에서 거래됐는데 요즘은 무려 3300개 기업이 이곳에 둥지를 틀고 있다. 부도위기에 몰려 거래소나 나스닥에서 쫓겨난 기업들이 많다. 투자자로서는 이들 기업의 정확한 재무정보를 제때 얻어보기 어렵다. 애널리스트의 기업분석보고서는 아예 없다. 주식들은 한달 또는 1년에 몇 차례 거래되기도 한다. 하루 거래량은 7500만달러. 뉴욕증권거래소의 하루 거래대금 410억달러에 비하면 적을 수밖에 없다.
증시가 화끈하지 않기 때문인지 월가의 프로 투자자들이 요즘 핑크 시츠를 기웃거리고 있다. 여의도 식으로 말하자면 관리대상종목에 돈이 몰리는 셈이다. 핑크 시츠에서 거래를 많이 하는 힐 톰슨 마지드라는 회사는 요즘 뮤추얼펀드나 헤지펀드 등으로부터 거래 요청이 부쩍 많아졌다고 밝히고 있다.
찰스스와프는 핑크 시츠에서 거래되는 주식 수천 종을 확보해놓고 있다가 투자자들이 원하면 제공해주기도 한다.
투자자들의 관심이 높아지자 여기서 거래되는 기업의 재무자료를 확보해 투자자에게 정보를 알려주는 사이트(www.pinksheets.com)도 생겼다. 월가의 또 하나의 모습이다.
휴일을 지낸 뒤 21일 열린 뉴욕증시는 긍정적인 경제지표와 간판기업들의 실적호전 소식에도 불구하고 이라크전 위기가 고조돼 주가는 오전부터 크게 빠졌다.
뉴욕=홍권희특파원 koni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