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전초전이 한창이던 2001년 12월 인천 송도비치 호텔에서 열린 시지부후원회에 함께 참석한 노무현 고문, 김중권 이인제 최고위원 등이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99년 11월9일.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지방행사차 대구에 내려가 있던 김중권(金重權) 비서실장을 찾아 “급히 상의할 일이 있으니 상경하는 대로 찾아오라”고 지시했다.
다음날 관저로 찾아온 김중권에게 DJ는 비서실장을 그만두고 2000년 4·13 총선에서 영남지역에 출마할 것을 권유했다.
DJ가 김중권에게 총선 출마를 권한 것은 이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러나 DJ의 태도는 여느 때와 달랐다. 출마 지시도 강력했지만, 한가지 ‘조건’을 덧붙였기 때문이다. 요지는 “이번 출마는 차기 후보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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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권은 “대통령과 단둘이 나눈 얘기를 내 입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김 대통령이 나에게 영남에 가서 의석을 확보하라고 말하면서 후계구도를 염두에 둔 것만은 틀림없다”고 말했다. DJ는 이미 공개석상에서 몇 차례 김중권을 ‘권력의 2인자’라고 호칭한 적이 있었으나 후계문제에 대해 직접 언질을 준 것은 이때가 처음이라는 게 김중권의 설명이다.
아무튼 DJ의 기대와 달리 4·13총선에서 자신의 고향인 경북 울진에 출마한 김중권은 16표 차로 석패했다. 이에 대해 여권의 한 핵심관계자는 당시 “김중권의 낙선은 단순히 의석 1석을 잃는 문제가 아니라 여권의 후계구도가 바뀌었음을 의미하는 사건이다”고 말할 만큼 그에 대한 DJ의 기대는 컸다.
그러나 김중권의 낙선 이후에도 DJ는 그에게 변함 없는 애정과 신뢰를 보냈다. 총선 두 달 뒤인 2000년 6월 어느날. DJ는 실의에 빠져 있던 김중권을 불러 민주당 최고위원 경선 출마를 권유했다.
뿐만 아니다. 2000년 11월23일부터 29일까지 동남아국가연합(ASEAN)+한 중 일 3국 정상회의 참석차 싱가포르와 인도네시아를 방문한 DJ는 특별 수행원자격으로 동행한 김중권을 현지에서 독대, 민주당 대표직을 맡을 것을 통보했다. 이때도 후계문제에 대해 또 한번 언질을 줬다.
DJ의 김중권에 대한 이 같은 ‘집착’은 “영남후보라야 차기 대선에서 당선될 수 있다”는 그의 확신 때문이었다는 게 주변인사들의 얘기다.
DJ에 의해 대통령비서관에 발탁돼,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관찰할 수 있었던 기자 출신 C씨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후계 문제에 있어 DJ가 우선 고려했던 것은 △영호남에서 고른 지지를 얻을 수 있는, 따라서 당선 가능성이 높은 동서화합형이어야 하고 △자신의 정책을 이어갈 것이라는 신뢰감을 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김중권을 적임자라고 생각한 것 같다.”
물론 DJ의 심중, ‘김심(金心)’에 정통한 동교동계 구주류 인사들의 견해는 좀 다르다. DJ가 후계문제와 관련해 다양한 사전포석을 하는 과정에서 한때 김중권도 대안의 하나로 생각했을 뿐이었다는 얘기다.
구주류의 한 핵심인사는 “DJ가 정부 출범 초기 대구 경북(TK) 출신인 이수성(李壽成) 전 국무총리에게 평통 자문회의 부의장을 맡긴 것도 그에게 전국적 조직망인 평통조직을 통해 네트워크를 만들고 통일문제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 차기주자로서의 위상을 만들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이 전 총리는 DJ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2000년 8월 노무현(盧武鉉) 대통령당선자가 해양수산부장관에 기용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는 게 청와대 핵심관계자들의 증언이다. 실제 노 당선자가 각료로 기용되기 두 달이나 전인 2000년 5월 DJ는 자신의 한 핵심측근에게 “노무현은 지역감정의 벽에 여러 차례 도전한 훌륭한 사람이다. 대권주자군의 일원으로 키우기 위해 입각시키겠다”는 얘기를 했다.
이렇게 보면 김중권에 대한 DJ의 집착도 결국 후계구도에 대한 큰 틀 구상의 일환이었다는 설명이 좀 더 설득력을 갖는 것 같다.
이 과정에서 DJ는 김중권과 동교동계간의 협조도 차기구도를 만들어내는 데 중요하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던 듯 하다. 99년 5월 터져 나온 옷로비 사건 때 김태정(金泰政) 전 법무장관의 퇴진 여론을 대통령비서실이 대통령에게 제대로 전달했느냐의 여부를 놓고 김중권측과 구주류가 갈등을 빚는 상황에서 DJ가 취한 행동은 이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옷로비 사건 당시 러시아를 방문중이던 DJ는 전화로 김중권에게 “신문에 신주류 구주류 하던데, 그게 무슨 소리요”라고 물었다. DJ는 옷로비사건의 보고책임을 둘러싼 동교동계와의 갈등을 말하는 것이란 설명을 듣고, 6월1일 귀국하자마자 권노갑(權魯甲) 전 민주당 고문, 한화갑(韓和甲) 의원 등 동교동계 사람들을 관저로 불렀다.
권노갑은 그 직후 김중권에게 전화를 걸어 6월7일 프라자호텔에서 식사를 할 것을 제안했다. 식사자리에는 권노갑 등 이른바 동교동 가신들이 6명이나 나왔다. 이 자리에서 권노갑은 “우리가 김 실장이 일 잘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회동직후 최재승(崔在昇) 의원은 곧바로 당 기자실에 가서 회동 사실을 밝힌 뒤 ‘신구주류 갈등은 없다’고 발표했다.
이에 대해 동교동계 L씨는 “그때 DJ가 김중권을 도와주라고 한 것은 맞다. 그러나 이를 DJ가 김중권의 손을 일방적으로 들어줬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역설적이지만, DJ는 차기 구도를 포함한 현실 정치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있어 동교동계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실제 동교동계는 김중권이 2000년 8·30 전당대회에서 3위로 최고위원에 당선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권노갑은 측근인 박양수(朴洋洙) 의원을 김중권 진영에 보내 조직활동을 지원했다. 이에 대해 권노갑은 “당시 나는 최고위원은 TK의 김중권, 서울의 정대철(鄭大哲) 하는 식으로 각 지역의 대표성을 가질 수 있는 인물이 골고루 나오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김중권을 민 것은 그런 차원에서 한 것이다”고 설명했다.
동교동계는 김중권을 집권당의 ‘그림’을 모양 좋게 만들 수 있는 인물이자 자신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여러 대상 중의 하나로 인식했다는 얘기다.
DJ의 의중이 자신에게 있다고 판단하고 있던 김중권과는 상황인식에 있어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던 셈이다. 양자의 이 같은 인식차는 김중권이 DJ로부터 두 번째로 후계문제에 대해 언질을 받고 당 대표직에 취임한 이후 갈등으로 표면화됐다.
2000년 12월18일 민주당 대표에 취임한 김중권은 DJ의 신임을 바탕으로 ‘강한 여당’을 내세워 정국 드라이브를 걸었다. 이미 DJ가 그려놓은 그림이기는 했지만 자민련 교섭단체 구성을 위해 민주당 의원 3명을 꿔준 것도 그가 대표직에 취임한 직후 추진된 일이다. 그러나 김중권의 정국 주도는 오래가지 않았다.
김중권은 이미 당에서는 동교동계에, 청와대에서는 범동교동계인 한광옥(韓光玉) 대통령 비서실장, 박지원(朴智元) 대통령정책기획수석 등에게 완벽하게 포위돼 있었다.
2001년 3·26개각 때의 해프닝은 여권 내에서 점차 ‘소외’돼 가던 김중권의 현실을 보여주는 사례. 김중권의 설명.
“3·26개각을 앞두고 대통령과 인선문제 등에 대해 상당한 협의를 했다. 그러나 정작 개각 날짜는 3월25일 밤까지 까맣게 모르고 기자들에게 ‘개각 없다’고 했다가 다음날 개각이 단행되는 바람에 우습게 된 일이 있다. 내가 대통령비서실장 할 때는 여당대표에게 적어도 하루 전에는 개각의 대강을 통보해 줬는데, 그때는 전혀 통보가 없었다.”
DJ와의 관계가 소원해지면서 동교동계와의 불화도 깊어졌다. 김중권은 권노갑의 인사개입 논란 등을 둘러싼 당내 ‘1차 정풍(整風) 운동’의 와중에서 8월27일 정풍파의 동교동계 퇴진요구에 가세해 당무거부라는 초(超)강수를 던지며 DJ와 동교동계를 압박했으나 무위로 돌아갔고 결국 9월11일 당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자기 독자권력기반이 없는 한 대통령과의 거리가 멀어지는 것이 바로 권력에서 멀어지는 것이란 평범한 상식에서 그도 벗어나지 못했다. 대표 사퇴 후 지금까지 김중권은 DJ를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당사자의 변▼
1월9일자 ‘비화 국민의 정부’ 내용과 관련, DJ의 처조카인 이영작 박사는 자신이 DJ에게 주미대사로 보내달라는 요청을 한 일이 전혀 없으며 비중 있는 정치인을 주미대사로 기용하는 게 좋겠다는 건의를 한 바 있다고 알려왔습니다.
▼민주대연합 성사 왜 안됐나▼
김대중(金大中) 정부 초기 영남과의 관계설정 문제는 권력핵심내부의 치열한 논쟁거리였다.
민주화 추진세력인 동교동과 상도동계가 힘을 합쳐야 한다는 ‘민주대연합론’이 부산 경남(PK)과의 연대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면 ‘동서화합론’ 혹은 ‘동진(東進)론’은 경제개발세력인 대구 경북(TK)과의 지역연합을 논거로 한 것이었다.
민주대연합론은 당시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이었던 동교동계의 문희상(文喜相) 차기 대통령비서실장이 선봉에 섰다. 역사적으로 보나, 시대적 당위로 보나 DJ정부는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측과 연합해야 한다는 논리는 동교동 내의 대세였다. 그러나 당시 김중권(金重權) 비서실장은 5공세력을 포함한 TK와의 연대를 주장했다.
민주대연합론을 밀었던 김정길(金正吉) 전 행정자치부장관은 “98년 3월초 장관 신임 인사차 상도동을 방문했더니 YS가 ‘DJ가 대통령 당선된 것은 잘된 일이다’고 좋아했다”며 “그때 YS를 끌어안았으면 민주대연합은 곧바로 성사됐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DJ는 민주대연합론보다 동서화합론 구상에 힘을 실어줬다. 개발세력의 상징인 고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기념관 건립 약속,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과의 화해 추진 등이 단적인 예.
동교동계 인사들은 “DJ가 그런 선택을 한 것은 민정계 출신으로 YS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던 김중권의 영향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다른 여권관계자는 “민주대연합이 성사되지 못한 기본 원인은 DJ의 YS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감 때문이다. DJ는 당시까지도 YS와 화해하는 것이 감정적으로 용납되지 않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명단▼
▽팀장=이동관 정치부 차장
▽정치부=윤승모 차장급기자
박성원 최영해 김영식 부형권 이승헌 기자
▽경제부=반병희 차장
김동원 김두영 신석호 기자
▽사회부=하종대 이명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