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척이나 기다렸던 캄보디아의 앙코르 유적지. 그러나 흥분만큼이나 부끄럽기도 했던 답사였다. 입구부터가 그랬다. 3일 관람권을 신청했더니 현지 안내원이 짐짓 놀란다. 사연인즉 한국 손님은 거의가 1일권, 그나마 반나절이면 다 둘러보고 사진 찍고 화끈하게 끝내준다는 것이다. 일본인은 3일권, 유럽인은 1주일권을 산다면서 입가에 묘한 웃음을 짓는다. 그게 문화 수준의 차이란 뜻이렷다. 괘씸한 생각이 들었지만 따져 묻진 않았다.
정글을 한참이나 달린 버스가 선 곳은 앙코르와트. ‘와!’ 일단 그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세계에서 가장 큰 석조 건물이란 설명이 굳이 필요 없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건 가까이서 본 부조물(浮彫物)의 섬세함과 정교한 조각상들이다. 불가사의란 말 이외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문제는 보존 상태. 다행히 이곳은 대체로 상태가 좋았지만 다른 곳의 유적들은 거의 원형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훼손이 심했다. 400년 동안 정글 속에 묻혀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타푸롬 사원은 아예 복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거대한 나무뿌리들이 벽을 뚫어 집은 무너지고 나머지는 마치 악마의 손에 옥죄인 모습으로 겨우 지탱하고 있다. 인간의 오만과 무모함에 자연이 반기를 들고 도전한 듯해 숙연해지기도 한다.
이 드넓은 유적지에 발견된 사원만도 290개. 세월의 무게에 지금도 붕괴는 진행되고 있다. 고맙게도 이 위대한 인류의 문화유적을 지켜내겠다는 인간의 의지와 도전 역시 대단하다. 거대한 자연의 힘에 대항하기엔 힘겹지만 여기저기서 복구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뜨거운 염양(炎陽), 바람 한 점 없는 정글 속, 높은 습도의 나라에서 1년 중 가장 시원하다는 그 날 기온은 37도였다. 이런 열악한 환경과 싸우며 도면을 펼쳐 들고 열심히 현장 지휘를 하는 사람들이 마냥 존경스럽다. 이 고장 사람 같진 않고 어느 나라 사람일까. 현장을 기웃거리는데 옆에 작은 안내판이 보인다. “이곳 복구사업은 프랑스가 담당하고 있습니다.” “아, 그렇군!” 그 낡은 안내판에 그려진 프랑스 삼색기가 어쩌면 그렇게도 멋져 보이던지. 저만치 건너편엔 독일 담당구역이다. 일본과 중국도 구석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앙코르 유적만큼이나 나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건 복구현장의 그 작은 간판이었다. 그리고 그 나라 국기. 사라져 가는 인류의 유산을 지켜내려는 그 진지한 노력 앞에 우린 깊은 감사와 존경을 갖게 된다.
한 나라가 이런 일에 뛰어들 결심을 하기란 쉽지 않다. 돈만 있다고 되는 일도 아니다. 그 나라의 성숙된 문화마인드가 있어야 한다. 거기에다 고도의 기술, 인내와 정성, 전 인류에 대한 사명감, 우리가 대신한다는 책임감, 이런 것들이 어우러져 이 힘든 사업에 뛰어들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보람과 보상은 크다. 온 세계 사람들이 이곳을 거쳐가며 잠시라도 갖게 되는 존경과 감사,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보상이다. 당장 그 나라의 품격이 달라진다. 그 작은 간판이 나라 이미지를 격상시킨다. 난 몇 해 전 로마 교황청, 미켈란젤로의 벽화 보수를 일본이 하고 있는 현장을 보며 감동 받았다. 경제동물이니 어쩌니 하면서 시샘하던 내 입버릇이 그 날 이후 싹 가신 것이다. 국가 이미지 홍보에 이보다 더 좋은 전략이 또 있을까.
내가 정말 안타깝고 부끄러웠던 건 세계 수많은 유적지 어느 곳에도 태극기 간판 하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앙코르와트도 예외가 아니다. 항의라도 하는 기분으로 현장사무실을 찾았다. 한국? 직원의 태도가 냉담하다. 어쩐지 기분이 섬뜩하다. 놀라지 말자. 복구를 위해 세계 각국에서 기금이 답지하고 있지만 오늘까지 한국은 한푼도 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국가 중 유일하다는 게 직원의 설명이다.
귀국 길, 베트남 호치민공항에서 전통문화학교 김병모 총장 일행을 만난 게 그마나 위안인가. 외교통상부, 문화관광부, 유네스코, 박물관 등 우리나라 문화정책 담당자들이 다 모였다. 앙코르와트를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하지만 문전박대만 당했단다. 우선 복구는 우리 기술로는 역부족이라고 했다. 거기다 “이제 와서 뭘 하겠다는 거냐”는 게 그곳 반응이란다.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 들고 덤벼든 꼴이 된 셈이다.
“발굴사업이라면 우리도 자신이 있지만, 끼워줘야지요.” “아이고, 우리 유적도 제대로 못 챙기면서….”
우리 정부의 문화정책이 오죽했으면 이런 자조적인 말들이 나올까. “하지만 당신네들이 책임자 아니오, 힘내시오. 더 크게 나팔을 부시오, 한판 할 일이 있다면 한판 붙자고요.” 비행기 대기 시간이 길어지면서 죄 없는 맥주잔만 두들겨댔다.
이시형 사회정신건강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