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게이츠의 아버지 윌리엄 게이츠 시니어.뉴욕=홍권희특파원
“야구를 하는데, 한쪽은 홈베이스에서 시작하고 한쪽은 3루에서 시작한다면 그게 공정한 겁니까?”
거액을 상속받은 부잣집 자녀와 가난한 집 자녀의 경쟁을 이야기할 때 한국에선 흔히 ‘달리기 출발선이 다르다’고 비유하는데 윌리엄 게이츠 시니어(78)는 야구를 예로 들었다.
15일 저녁 미국 뉴욕 맨해튼의 센트럴 파크가 길 건너에 있는 고풍스러운 ‘뉴욕 윤리문화’ 빌딩 강당. 게이츠씨는 300여 청중에게 편안한 눈길을 주며 “미국에서 상속세는 재산이 많은 전 국민의 2%에게만 부과될 뿐인데 이것이 공평하지 않다면서 없애려 하면 안된다”고 강조했다.
그가 바로 마이크로소프트의 회장인 빌 게이츠 3세(46)의 부친이다. 작년 포브스지 선정 세계 최고부자 랭킹 1위(528억달러)인 아들 부부의 기부금으로 운영하는 빌-멜린다 게이츠 재단의 공동 이사장을 맡고 있다. 빌은 1994년 이후 지금까지 재단에 170억달러를 기부했으며 재단은 55억달러를 의료 및 교육사업 등에 써왔다. 게이츠 이사장은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법무법인을 공동운영해온 유명한 변호사 출신으로 변호사협회와 상공회의소 등에서 다양한 활동을 펴온 사람이다.
● “빈부격차 심화” NYT에 ‘반대’ 광고
한국에선 바보나 낸다고 해서 ‘바보세’라고 불리는 상속세는 미국에선 ‘죽음세’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미국의 상속세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극심했던 1916년 새로운 귀족주의가 나타나는 것을 막기 위해 도입됐다. 게이츠 이사장이 부자들이 싫어하는 ‘죽음세’를 살려둬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은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기회만 있으면 폐지하려 하기 때문. 부자들에게만 물리는 세금을 깎거나 없애주겠다는데 부자들이 거부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게이츠 이사장은 이날 강연에서 소신을 밝혔다.
“상속세를 폐지하면 그러지 않아도 문제인 빈부격차가 더 심각해질 것입니다.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집니다. 상속세가 없어지면 매년 300억달러의 세수(稅收)가 줄어들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다른 세금을 더 거둬야 합니다. 또 상속세가 없어지면 세금을 피하려고 부자들이 내는 기부금이 훨씬 줄어들게 될 겁니다.”
부시 정부가 상속세 폐지 법안을 의회에 처음 제출한 것은 2001년이었다. 1조3500억달러의 세금을 깎아주겠다면서 추진한 내용 중 하나였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반대파가 들고 일어났다. 가장 활발하게 운동을 벌인 사람은 다름 아닌 최고부자들. 게이츠 이사장과 ‘전설적인 투자자’ 워런 버핏(재산 350억달러로 포브스 부자 랭킹 2위), ‘금융의 연금술사’라는 별명의 조지 소로스, 석유왕 록펠러의 후손인 데이비드 록펠러 시니어 등이었다. 억만장자인 이들이 뉴욕타임스에 ‘상속세 폐지 반대’ 광고를 내자 이들의 활동을 잘 몰랐던 사람들은 “사람이 개를 물었다네” 하면서 신기해하기도 했다.
상속세 공방전 1라운드는 부시 정부의 판정승이었다. 부시 정부의 당초 구상은 상속세를 내지 않는 최저선인 면세점을 60만달러에서 2009년 350만달러까지 매년 높여가고 2010년에는 세금을 완전히 없애자는 것이었다. 게이츠 이사장을 위시한 반대론에 묶여 완전히 없애지는 않고 2010년 한해만 없앴다가 다음해부터는 2001년 상태로 되돌아가기로 결정됐다.
● 전국순회 강연 통해 ‘부시와의 전쟁’
이제 2라운드. 부시 대통령은 새해들어 경기를 부추기기 위한 6740억달러 규모의 감세안을 들고 나오면서 다시 상속세 완전 폐지를 주장했다. 게이츠 이사장은 ‘부시와의 전쟁’을 위해 척 콜린스와 함께 평소 소신을 ‘부와 우리나라(Wealth and Our Commonwealth)’라는 책으로 펴냈다. 뉴스위크는 이 책에 ‘억만장자의 반란’이라는 딱지를 붙여주었다. 게이츠 이사장 일행은 전국을 돌며 동지를 규합하기 위해 책 알리기 전국일주 강연에 나서 워싱턴에서 시작해 뉴욕에 오게 된 것이다. 게이츠 이사장은 “2년 전엔 우리가 졌지만 지난 가을 미식축구를 보니까 약한 팀들도 많이 이기더라”면서 전열을 정비 중이다.
이번 강연은 미국의 상위 5% 부자들이 회원인 ‘책임을 다하는 부(Responsible Wealth)’라는 단체가 마련했다. 이 단체는 “경제 호황기에도 그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계층이 있게 마련”이라며 부자들의 사회에 대한 봉사와 책임을 강조하기 위해 1997년 결성됐다. 회원 200명은 1998년 정부가 깎아준 투자소득에 대한 세금 300만달러를 공정세제와 경제정의를 위한 단체 지원비로 내놓기도 했다. 이 단체 회원인 밥 버닛트 전 시스코 부회장의 짤막한 ‘맹세’가 그 사연을 말해준다. “세금 좀 그만 깎아주세요. 우리는 그런 거 필요도 없고, 받지도 않을 겁니다. 나는 작년 투자소득세 깎아준 것을 내놓겠습니다. 올해 저 같은 부자에게 또 세금을 깎아준다고 하면 이젠 모두 거부한다고 소리칠 겁니다.”
● 폴 크루그먼 교수도 동참해 감세 비판
뉴욕 강연엔 세계적인 석학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가 함께 나섰다. 뉴욕타임스에 칼럼을 쓰고 있는 그는 ‘부자를 위한 자본주의’로 치닫는 부시 정부의 경제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해 왔다. 게이츠 이사장에 앞서 연설한 크루그먼 교수는 “어릴 때 산업혁명에 따라 생겨난 거부들이 지은 어마어마한 맨션(대저택)들로 소풍을 간 기억이 있다”면서 “요즘은 이보다 더한 유럽식 궁같은 집들도 들어서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빈부격차가 아주 짧은 기간에 매우 빠른 속도로 확대되고 있는데 여기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덧붙였다.
연사가 부시 정부의 정책을 비판할 때 청중 속에선 “조지 부시”라는 구호가 이따금 흘러나와 청중을 웃겼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두시간여에 걸친 강연이 끝나자 20여명의 청중이 연단으로 몰려와 연사들과 즉석 토론을 이어갔다. 시민들이 “빈부격차가 얼마나 커졌느냐” “중산층을 살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등 질문을 퍼부어대자 대학생용 가방을 철제의자 옆에 내려놓고 있던 크루그먼 교수는 초등학교 교사처럼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25달러의 참가비를 내고 강연을 듣는 시민들, 부자들에게 세금을 물려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부자들. 강연장의 4, 5층은 됨직한 높은 천장에 잘 어울리는 강연이었다. 게이츠 이사장은 2월초까지 대도시를 돌며 강연을 하고 3월초 시애틀에서 상속세제 유지를 주장하는 콘퍼런스에서 기조연설을 할 예정이다.
뉴욕=홍권희특파원 koni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