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들어 우리 시민사회의 으뜸 화두는 단연 ‘참여’였다. 오랜 권위주의 정권들 아래에서 움츠렸던 주권의식이 기지개를 펴면서 참여 욕구가 확산된 결과였다. 민주, 정의, 시민, 자치, 연대, 참여를 표방하며 조직된 시민단체들의 지향은 하나같이 국민 참여, 시민 참여였다.
참여의 문제는 대의민주주의 하에서 정치적으로 소외를 경험한 일반 시민들에 의해 제기된 것이었다. 우리 사회에서는 지난 수십년간의 압축적 근대화 과정에서 모든 문제가 중층적으로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우리에게 참여란 권위주의와 그것이 형해화한 유사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저항이자 애써 얻어낸 대의민주주의 자체의 대안이라는 복합적 성격을 띠고 있다. 그래서 그 욕구가 더 강렬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들이 직접 선출한 대표자들이 공익에만 복무할 것이라는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 부서지면서 국민은 더 이상 가만히 앉아서 다음 선거를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국정의 모든 영역에 국민이 직접 참여해야 한다는 이른바 참여민주주의야말로 대의민주주의를 보완할 유일한 대안으로 인식하기에 이른 것이다.
▼'인터넷' 장점 불구 대표성 부족▼
지난 대통령 선거를 전후한 시기에 우리는 국민 참여의 폭발을 보았다. 월드컵에서의 경험이 국정의 마당까지 연장된 것인가. 후보 선출 과정에서 이미 국민경선이 실시되어 국민 참여에 개방되었고 심지어 여당 대선후보 단일화 과정에서는 여론조사방식이 채택되어 사람들은 일상에서 참여하는 희귀한 체험도 하게 되었다. 대선에서도 자발적 선거운동 참여도가 승패를 좌우했다는 분석도 있었다. 그 흐름을 반영하듯 이제 선거에서 승리한 대통령당선자측에서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국민참여센터를 설치하고 정책 수립, 인사 추천에까지 참여의 문호를 활짝 열어젖혔다. 그리하여 인터넷 등을 통한 제안이 폭주하고 있고 인수위가 시민단체와 정책간담회를 가지는 초유의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청와대에 국민참여를 담당할 수석비서관까지 둘 것이라고 한다. 이만하면 참여의 미학을 국가정책화하라던 어느 사회학자의 제안이 실천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현재 진행되고 있는 참여에 대한 평가는 두 가지 조정 내지 수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먼저, 참여의 방식이다. 대종을 이루고 있는 인터넷 참여 방식은 선거나 일반 미디어의 일회성, 일방성을 뛰어넘는 지속성, 쌍방통행성이라는 탁월한 측면이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참여폭의 제한성은 충분히 고려되어야 한다. 인터넷 인구 2000만이라고 하더라도 아날로그세대나 디지털세대 중에서도 소위 디지털 디바이드(정보격차)를 겪고 있는 정보소외계층과 어린 세대를 빼고 나면 이들이 여론의 다수를 대표한다고 보기는 힘들다. 공식적 대표성의 보완이라는 참여의 의의가 비공식적 대표성의 결핍이라는 역설 때문에 퇴색되는 일은 막아야 한다.
다음, 참여의 주제다. 현재는 정부 이양기라는 시기적 특성 때문에 정책 변화나 인사 문제에 집중되겠지만 참여민주주의가 주목하는 부분은 참으로 다양하고 광범하다. 이미 상당부분 효과를 내고는 있지만 행정 참여는 중앙정부차원이든 지방정부차원이든 더욱 확대되어야 한다. 선거 감시, 의정 감시, 입법 청원, 국민 발안 등을 통한 입법 참여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분야다. 사법 참여는 아직 미미한 효과밖에 보지 못하고 있는 영역이다. 사법 감시의 눈은 제법 예리해졌지만 법관 임용에서의 선거나 추천, 재판에서의 배심이나 참심 수준의 사법 참여는 아예 없다. 우리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중요한 참여민주주의의 목표다.
▼침묵하는 다수의견 읽는 지혜를▼
모든 일이 그러하듯 참여 문제에서도 균형은 역시 중요한 덕목이다. 발언하는 소수와 침묵하는 다수는 어떤 관계인가. 후자는 전자의 추정적 동조자들인가. 디지털세대의 발언은 아날로그세대의 침묵에 의해 얼마나 묵시적 동의를 받고 있는가. 이 판단은 어차피 국민이 뽑은 대표자의 몫이다. 이를 가릴 지혜의 눈은 민주주의란 다원성과 관용의 체계임을 깊이 통찰하는 심안에 의해서 비로소 빛날 것이다.
박인제 변호사·객원논설위원 ijpark2356@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