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가려면 60∼70년 전처럼 오직 배를 타고 대한해협을 건너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도쿄행 비행기에 올라타서는 60∼70년 전의 시인들이 쓴 시구(詩句)를 떠올리곤 했다. “이 바다 물결은 예부터 높다”고 알린 시인은 임화였고,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알려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모지 바다가 무섭지 않았다”고 고백한 시인은 김기림이었다.
지난 일주일 동안 도쿄에 머물던 중 어느 하루 요코하마로 향했다. 100년 전, 그리고 그 이후 도쿄 유학길에 올랐던 한반도의 지식인들, 특히 그림 그리는 이들의 족적을 밟다가 우발적으로 감행한 것이었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은 오래 전부터 예정된 길이었다. ‘현해탄’의 시인 임화의 격정적인 장시(長詩) ‘우산 받은 요코하마의 부두’를 나는 잊지 않고 있었다.
▼문 활짝열고 富이뤄낸 개항지▼
요코하마로 가는 도중 시나가와 역을 지났다. 임화의 ‘우산 받은 요코하마의 부두’보다 넉 달 앞서 일본에서 ‘비 내리는 시나가와 역’이란 시가 발표된 바 있었다. 우산과 비, 요코하마와 시나가와가 같은 맥락이라는 것을 오래 전 김윤식의 저서 ‘임화 평전’에서 읽었던 기억이 새로웠다. 그림도 그렇지만 시나 소설 속의 현장을 스쳐 지나가거나 그곳에 직접 서 볼 때의 감회는 두 가지, 황홀감이거나 공허감이었다. 드물게 황홀감도 공허감도 아닌 무중력 상태에 놓이는 경우가 있는데, 시나가와 역을 지날 때 내 감정이 그랬다. 내 의식에는 온통 임화의 비 내리는 요코하마의 부두만이 아득히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港口의 계집애야! 異國의 계집애야! 독크를 뛰어오지 말아라. 독크는 비에 젖고 내 가슴은 떠나가는 서러움과 내어쫓기는 분함에 불이 타는데 오오 사랑하는 港口 ‘요코하마’의 계집애야! 독크를 뛰어오지 말아라 난간은 비에 젖어 있다.”
요코하마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다. 부두에는 우산도, 항구의 계집애도, ‘추방이란 표를 등에다 지고 이 크나큰 부두를 나오는’ 식민지 근로 청년도 보이지 않았다. 일본에 굴욕과 도전의 미래를 일깨워 준 개항지로서의 역사적 기념물들로 가득한 어제의 요코하마가 있었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지상 등대와 일본에서 가장 높은 70층 빌딩을 자랑하는 21세기의 요코하마가 있었다. 초고층 빌딩들과 지상 등대 사이에 난 기나긴 부두를 걸었다. ‘태평양의 여왕’이라 불리던 호화 여객선 히카와(永川)호가 검은 선체를 물에 드리운 채 세월의 미풍에 가만가만 흔들렸다.
일본에서 돌아오면서 강화도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강화도에 가서야 비로소 나는 요코하마의 실체를 조금 알 수 있으리라. 일본이 매튜 페리 제독을 앞세운 미국의 압력에 요코하마를 정식 개항한 것이 1859년, 일본이 미국을 본떠 운요호사건을 일으켜 조선에 강화도조약을 통해 개항을 강요한 것이 1876년. 개항 후 일본은, 아니 요코하마는 어떻게 되었나? 요코하마 개항 자료관과 길 건너에 있는 실크센터를 돌아보니 어느 정도 윤곽이 잡혔다. 요코하마에 실크라니? 임화의 비 내리는 요코하마에만 사로잡혔던 나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했다. 실크의 누에 속에 근대 일본 경제의 촉매제가 도사리고 있었음을 나는 도무지 몰랐던 것. 개항지 요코하마가 누린 최대 특수는 실크 수출. 실크는 요코하마에 부를 가져다주었고 국제 도시로 상업을 번창시키면서 근대 일본 경제를 일으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 강화에 다시 가봐야겠다 ▼
1년이면 서너 차례 강화도를 찾곤 했다. 섬의 수수한 풍광과 서해 바다의 은은한 낙조에 마음을 주고 오곤 했는데 이번엔 초심으로 돌아가 개항지의 현장에 설 것이었다. 강화도 어디에서도 실크는 찾을 수 없을 것이었다. 실크를 찾아 인천 연안부두로 가야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는 잊지 않고 초지진 돈대(墩臺)에 올라 임화의 ‘우산 받은 요코하마의 부두’ 끝 부분을 분연히 중얼거릴 것이었다.
“항구의 내 계집애야! 그만 ‘독크’를 뛰어오지 말아라. 비는 연한 네 등에 내리고 바람은 네 우산에 불고 있다.”
함정임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