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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전야 바그다드 긴급르포 4]집권층 부패에 숨죽인 불만

입력 | 2003-01-28 18:31:00

권기태기자


《바그다드의 해방광장 인근 할러리 상가. 전자제품과 CD판매대 등이 즐비하다. 톰 크루즈, 톰 행크스, 줄리아 로버츠 등 미국 배우들의 대형 브로마이드와 ‘로드 투 퍼디션’ ‘매트릭스’ ‘캐스트 어웨이’ 등 할리우드 영화의 복제 CD가 매장 곳곳에 깔려 있다. 이곳에서 만난 사담대학의 한 학생은 “카리 만수르(이라크의 인기 가수)만큼이나 브리트니 스피어스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

▽미국 대중문화 즐기는 이라크인들〓사둔거리 등 바그다드의 번화가에는 30여개의 인터넷 센터가 있는데, 대학생들은 대부분 ‘영광의 메달’이라는 컴퓨터 게임에 몰두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미국 병사가 독일 병사와 맞서 싸우는 내용이다. 이라크 청년들은 스스럼없이 미국 병사의 입장이 되어 총을 쏘고 폭탄을 던진다. 이곳이 과연 미국과 대치하고 있는 이라크의 수도인가 싶을 정도다.

중앙은행 근처 숄저르 시장에는 펩시콜라, 양담배, 맥도널드 햄버거의 상표를 복제한 제품들이 진열대에 올려져 있다.

“바그다드에만도 영어학원이 10곳이 넘고, 바그다드대 영어과는 법대 의대만큼 입학 경쟁이 치열하다.” 이라크 공보부로부터 기자와 동행하도록 지시 받은 공식 가이드(53)의 설명이었다.

▼연재물 목록 ▼

- [폭풍전야 바그다드 긴급 르포]권기태/제 3信
- [폭풍전야 바그다드 긴급 르포]권기태/제 2信
- [폭풍전야 바그다드 긴급 르포]권기태/제 1信

한 50대 시민은 “이라크는 1921년까지 영국 식민지였으며 8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과 괜찮은 사이였다”며 “나이 든 이들은 지금도 미국과 관계가 좋아지기를 고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라크인들은 미국이 이스라엘을 편들고, 패권을 휘두르는 데에는 반감을 갖고 있지만 미국문화나 미국인에 대한 적대감은 별로 없다”고 덧붙였다.

상류층 무역업자들과 과거 미 유학 출신자들을 중심으로 한 미국 시민권자가 바그다드에 만 수천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라크인들이 미국문화에 호의적인 것은 이라크의 이슬람교가 이란과 같은 근본주의 계열이 아니라 쿠웨이트처럼 세속화된 측면이 강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유엔의 경제제재가 가장 큰 고통〓“지금 생각해 보니 80년대는 낙원이었다. 젊은이들은 결혼하면 정부로부터 축의금을 받아 외국으로 신혼여행을 가고 고급 도요타 승용차를 지급 받았다.”

자동차 엔지니어 카시에르 아흐메드(52)의 회고. 오일머니가 넘쳐난 바그다드는 아랍 최고의 국제도시로 각국 무역상들이 들끓었으며, 나이트클럽에는 30개국에서 몰려든 무희와 매춘부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는 것.

90년 8월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한 뒤부터 모든 게 달라졌다. 유엔이 이라크에 경제 제재를 가하면서 3디나르에 1달러 수준이었던 화폐가치는 한때 3500디나르에 1달러까지 떨어졌다. 지금은 2000∼2200디나르에 1달러 수준. 인플레이션이 극심해 96년부터는 임시 지폐를 발행했다. 위조지폐도 널리 발견되고 있다.

아흐메드씨는 걸프전 이전 자신의 봉급은 500달러였지만 지금은 20달러라고 말했다. 이라크 정부의 국장급 이상은 월 50달러, 하급관리는 10달러를 받고 있다.

공보부의 한 관리는 “내 1년치 봉급(360달러 수준)이 사찰단원의 하루치 일당”이라면서 “사찰단원 봉급은 이라크가 석유를 판 돈으로 지불하는 것”이라며 곱지 않은 감정을 드러냈다.

유엔은 96년 금수(禁輸)조치를 일부 풀어 석유를 판 돈으로 식량 의약품 등 필수품을 살 수 있게 했다. 하지만 다른 품목들은 여전히 금수 품목이어서 이라크 내 국영공장의 절반 이상이 폐쇄된 상태다.

만수르 어린이병원의 루아이 카샤 원장은 “현재 백혈병으로 치료 중인 어린이만도 40명”이라며 “대부분 걸프전 당시 격전지였던 남부지역의 아이들이 이송돼 오는데, 미군 우라늄탄의 직간접 영향인 것 같다”고 말했다.

▽티그리스강의 봄날은…〓전쟁 징후가 뚜렷해지면서 집권층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분노와 반감도 커지고 있는 분위기다. 차량 소유자들은 1월 초 정부에 ‘차량 징발 동의 각서’를 제출했다. 집요하고 철저한 감시체제 때문에 대개는 드러내놓고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한 주민은 “후세인?” 하고 되물으면서, 세운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뒤집었다.

한 이라크 현지인은 “1000달러면 된다. 확실하게 군대 면제를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이미 두 차례 겪은 전쟁의 악몽이 재연되지 않을까 그저 걱정하고 있을 뿐이었다. 남부 바스라 출신으로 바그다드 숄저르 시장에서 의류를 팔고 있는 자와드 알 카시르(42)는 “걸프전 당시 바스라 고속도로에서만 2만명의 군인이 몰살됐다”며 “이 때문에 내 고향에는 노처녀들이 많다”고 말했다. 당시 징병됐던 청년들의 희생이 워낙 많아 상대를 구하지 못한 채 결혼 적령기를 넘겨버린 경우가 많다는 것.

카시르씨는 “경제가 황폐해지고 구직난이 심각해져 노총각들도 걸프전 이전보다 몇 배나 더 늘었다”면서 “어서 전쟁의 먹구름이 지나가고 경제제재도 풀려 ‘티그리스강의 봄날’이 찾아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권기태 기자 kk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