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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한마디에…” 아찔한 살인누명

입력 | 2003-01-29 19:52:00


경찰의 유도신문과 짜맞추기 수사, 검찰의 무리한 기소로 강도살인범으로 몰려 평생 감옥살이를 할 뻔한 피의자들이 항소심에서 살인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모(25) 황모(22) 방모씨(28) 등 3명은 2001년 7월 강원 속초시 H콘도 객실에 침입, 금품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반항하던 피해자를 옥상으로 끌고 가 폭행한 뒤 밑으로 떨어뜨려 숨지게 하고 인근 공원묘지에 암매장한 혐의(강도살인 등)로 2001년 11월 구속 기소됐다.

이들이 살인 및 시체유기 등 중죄인으로 몰린 것은 별건의 강도사건으로 체포돼 여죄를 추궁 받던 중 “이씨가 ‘당신이(황씨) 사람을 죽였다’고 말했다”는 경찰의 유도신문에 걸린 황씨가 엉겁결에 “내가 아니라 이씨가 죽였다”고 답변하면서부터.

이후 공원묘지에서는 이들의 진술대로 ‘휠라’ 상표의 티셔츠를 입은 40대 중반 남성의 변시체가 암매장된 상태로 발견됐고 이들은 1심에서 무기징역과 징역 20년 등 중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이들이 검경의 조사과정에서 부인(否認)과 시인(是認)을 여러 차례 반복했고 범행 장소·일시·동기 등 주요 진술내용이 서로 맞지 않는 등 일관성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또 검경이 증거로 제출한 자료에서도 의문점이 속속 드러나기 시작했다.

먼저 조서에는 범행시점이 여름철인 7월경으로 기재돼 있지만 발굴된 시체에서는 겨울옷인 긴팔 상의와 잠바가 같이 발견됐고, 약 4개월 전에 매장됐다는 검경의 주장과는 달리 국립과학수사연구소와 고려대 의대 등은 약 1년 전에 매장된 시체라고 추정했다.

또 객실에서 범행을 저지른 뒤 피해자를 옥상으로 끌고 가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고 평소 300∼400대의 차량이 주차돼 있는 주차장으로 피해자를 떨어뜨려 숨지게 했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려웠다.

더욱이 5층 건물 옥상에서 떨어졌다는 피해자의 시체에서는 골절 흔적조차 발견되지 않았고, H콘도측도 사건 발생 무렵 피해자가 타고 온 장기 방치 차량이나 남겨진 물건 등이 없었고 회수되지 않은 객실 열쇠도 없었다고 밝혔다.

이런 이유로 서울고법 형사5부(전봉진·全峯進 부장판사)는 “피고인들의 자백이 상식에 어긋난 부분이 많아 유죄를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며 살인 및 시체유기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다. 다만 별건의 강도 혐의만 적용해 황씨와 이씨에 대해 징역 4년씩을, 방씨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다.

한편 이들은 법정에서 “조사과정에서 경찰이 구타는 물론 2, 3일씩 굶기기도 하는 등 고문과 협박 때문에 자백했다”고 증언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 당시 발견된 변시체는 검찰의 기소 전 수사과정에서 화장해버려 제3의 살인사건 피해자일지도 모르는 변시체는 영원히 사라졌다.

길진균기자 le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