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점적기(Dripper)가 농업분야에서 이룬 기술혁신은 컴퓨터에서 인텔의 칩이 이룬 것과 맞먹는다.” 이스라엘의 실질적 수도인 텔아비브에서 북동쪽으로 55㎞ 떨어진 키부츠 마갈에 자리잡은 이스라엘 최대 관개업체 네타핌의 공장에 붙어있는 포스터의 내용이다. 점적기는 농작물이 정확히 필요로 하는 물만을 뿌리에 한 방울씩 떨어뜨려 주는 특수장비다.》
점적기가 설치된 이스라엘의 밭. 뿌리 부근을 지나는 호스에 장착된 점적기가 작물이 필요로 하는 만큼의 물만을 방울방울 떨어뜨려준다. 사진 맨 아래에 땅속으로 연결된 호스가 보인다 -마갈(이스라엘)=권재현기자
네타핌이 점적기에 대해 이처럼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작은 장치가 물 부족과 이로 인한 식량난을 해결할 수 있는 이른바 ‘점적농법’의 핵심부품이기 때문.
이스라엘은 1인당 최대 물 공급가능량이 연간 300t으로 한국(1200t)의 4분의 1 수준에 불과한 물 기근 국가다. 그러나 식량자급률은 70%에 이른다. 한국의 식량자급률은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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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국가 차원의 철저한 물 관리와 재처리수 이용 등에 힘입은 바 크다. 우선 농업용수를 대부분 파이프라인으로 공급해 누수는 물론 사막의 따가운 햇볕으로 인한 증발을 막고 있다. 또 전체 생활하수(7억㎥)의 38%(2억7000만㎥)를 처리해 농업용수로 재활용한다. 전체 농업용수(9억㎥)의 3분의 1이나 되는 많은 양이다. 여기에 최소의 물로 최대의 수확을 올려 ‘예술의 경지’라는 찬사까지 받고 있는 점적농법의 역할도 크다.
파이프를 통해 물을 공급하는 관수로. 기존 흙수로의 물손실을 막는 한편 논이 필요한 만큼만의 물을 공급할 수 있다. -해남=권재현기자
한국의 경우 농업용수는 2001년 현재 전체 용수(340억㎥)의 47%(159억㎥)를 차지한다. 전체 수자원의 절반가량이 식량수로 쓰이는 셈이다. 문제는 이 중 80%(130억㎥)가 논농사에 쓰인다는 점이다. 논농사는 물 속에서 벼를 재배하는 담수관개형으로 물을 방울 단위로 공급하는 이스라엘에 비해 물 낭비가 클 수밖에 없다.
국가안보정책연구소의 신은성(申恩聲) 선임연구원은 논물 중 실제 벼가 흡수하는 물은 6%밖에 안 된다는 조사 결과를 내놓았다. 30%가량은 흙으로 된 수로로 수송하는 도중 빠져나간다. 국내 용수로의 63%(2002년 기준)를 차지하는 흙수로는 외부로 노출된 개수로(開水路)이기 때문에 증발되는 물의 양도 23%나 된다. 따라서 배수로의 누수를 막고 논에 필요한 물을 정확히 공급하는 시스템을 도입할 경우 상당한 물을 절약할 수 있다.
지난해 말 간척사업이 끝난 전남 해남의 간척농지 736㏊의 논에서 현재 이런 실험이 진행중이다. 이곳의 논두렁에는 물이 흐르지 않는다. 논 용수는 모두 논두렁 지하 2m 아래에 파묻힌 68.2㎞ 길이의 파이프라인을 통해 공급된다. 또 이 파이프라인 끝에 일종의 수도꼭지 역할을 하는 밸브를 달아 1㏊ 단위로 필요한 만큼의 물만 공급한다. 국내 관수로(管水路) 사업은 아직은 대단위 간척지에만 보급돼 10%에도 못 미친다.
일본은 이미 60년대부터 관수로 사업에 착수해 50% 이상의 농수로를 관망으로 교체했다. 또 자동센서가 논의 취수량을 측정해 밸브의 개폐까지 원격조종하고 있다.
농업기반공사 농어촌연구소의 김영화(金永化) 책임연구원은 “기존 논의 용수 사용량이 ㏊당 5500t인 데 비해 관수로와 자동물꼬시스템을 도입하면 용수 사용량이 3200t으로 줄어 40%가량 절수 효과가 나타났다”고 말했다.
마갈(이스라엘)해남=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점적농법, 1석 5조▼
이스라엘의 점적농법은 1964년 농학자 심카 블라스에 의해 개발됐다. 남부 사막지대의 관개농법을 연구하던 블라스씨는 가로수 중에 특별히 성장이 빠른 나무를 발견하고 그 원인을 추적했다. 그 결과 가로수의 뿌리 부근을 지나던 하수도에서 방울방울 떨어진 물 때문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이를 바탕으로 ‘토양 대신에 작물에’라는 구호 아래 작물이 필요로 하는 물을 뿌리에만 집중 공급하는 농법을 개발했다.
점적기술의 핵심은 파이프 속을 세차게 흐르는 물이 뿜어 나오지 않고 방울방울 떨어지게 하는 것. 처음에는 작물 사이로 호스가 지나가게 하면서 뿌리 부근을 지날 때 20cm 길이의 보조호스(일종의 점적기)를 통해 물을 공급했다. 네타핌은 30여년간의 기술축적으로 이 점적기를 호스 내부에 장착할 수 있는 작은 크기로 압축했다.
네타핌의 농학자 두비 세갈은 “전통적 담수관개의 물효율은 40∼60%, 스프링클러 관개는 70∼85%인데 비해 점적농법은 90∼95%의 효율이 있다”고 말했다.
물 효율이 70%에서 95%로 늘어날 경우 단위 생산량은 20% 가량 증가한다. 또 점적기를 통해 비료도 공급하기 때문에 토양 및 수질오염을 함께 줄일 수 있다. 물 속에 녹아있는 나트륨과 칼슘 등이 과다하게 공급돼 토양이 파괴되는 관개농법의 부작용도 막을 수 있다.
결국 엄청나게 적은 물을 사용해 보다 많은 수확을 올리는 한편 토양과 수질오염도 막고 토양파괴도 막는 1석5조의 효과를 낳는 셈. 이스라엘은 전체 농지의 65% 가량이 점적관개지다.
네타핌의 교육책임자인 나니 카루는 “벼도 밭에서 재배한다면 점적농법이 가능하다”며 “논이냐 밭이냐는 선택의 문제일 뿐”이라고 말했다.
마갈(이스라엘)=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한국 논 순기능▼
논은 한국 농업용수의 80%를 소비한다. 벼를 물에 잠기게 해서 키우는 논농사는 주로 한국과 일본에서 이뤄진다. 중국과 동남아에서는 밭에서도 벼를 재배한다. 그래서 한국형 논농사의 경우 물 낭비가 심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는 논이 갖고 있는 여러 기능을 간과한 시각이라는 지적도 많다. 우선 논은 비가 많이 내리는 계절에 상당량의 물을 저장함으로써 홍수를 방지하는 효과가 있다는 점이다. 국가정책안보연구소 신은성(申恩聲) 선임연구원은 한국의 논 전체면적(2000년 기준 약 115만㏊)이 매년 담아내는 물의 양은 27억3000t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한다. 춘천댐 총저수량(1억5000t)의 18.2배에 해당하는 양이다.
논농사에 쓰이는 물 중에는 벼 생장에 쓰이는 것 외에 지하수를 만들어 내고 생태보존에 쓰이는 부분이 더 많다. 논물 중 일부는 햇빛에 증발되지만 많은 양은 논바닥 아래로 스며들어 하천으로 다시 유입된다. 그 양은 매년 53억8000t으로 추정된다. 한국 국민의 수돗물 사용량(68억7000t)의 78%에 해당하는 양이다.
또한 논물은 수초와 논게, 미꾸라지 등 논에서 자라는 수많은 생물체의 보금자리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사용되는 물의 양은 농업용수의 70% 가량으로 추산된다논물은 평탄한 지형에 위치하기 때문에 경사지서 유실되는 흙을 받아내 토양 입자가 하천이나 바다로 유실돼 쌓이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도 한다.. 신 선임연구원은 “논 용수의 상당수는 하천으로 환원돼 생활용수 등으로 재활용되고 있다”며 “논의 순기능을 고려한 새로운 물 수요량 산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