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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민칼럼]‘퍼주기’와 ‘봐주기’

입력 | 2003-02-03 19:15:00


인생 전체의 3분의 1을 억압상태에서 보냈다는 김대중 대통령은 ‘2억달러 사건’으로 그기간 중 당한 것보다 더 큰 고통을 여생에서 겪어야 할지 모른다. 감옥에는 다시 안가더라도 많은 국민의 분노가 그를 정신적으로 외롭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 기만극의 중심에 대통령이 서 있었다면 그 대가는 보통 크지 않을 것이다.

작년 9월 엄낙용 전 산업은행 총재의 국회 증언으로 의혹이 드러났을 때 청와대와 민주당은 ‘야당이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모략질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심지어 엄 전 총재를 검찰에 고소까지 하면서 진실게임 하듯 쇼를 부린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억울하다며 가슴치다가 지금에 와서 ‘통치행위’를 들먹이는 것이 그들의 도덕적 수준이다.

▼‘돈 안주면 문전박대’ 나쁜 선례▼

우리가 정치인들에게 속아 지낸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는 모른다. ‘2억달러’ 사건 역시 진실이 감춰진 상태에서 우리는 대통령선거를 치렀다. 사건의 전말이 대선 이전에 밝혀졌더라도 과연 유권자들의 선택이 지금과 같았을지 궁금하다. 그런 면에서 투표일까지 필사적으로 이 문제를 덮어두려 했던 정부 여당은 일단 시나리오대로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새 집권층이 바라는 것처럼 ‘들불’이 ‘묵은 볏짚’만 태우고 꺼져 줄지는 의문이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북한 ‘퍼주기’와 현대 ‘봐주기’ 때문인데 이 두 가지는 규명돼야 할 연결고리들이 워낙 많아 앞으로 상당기간 파장이 에너지를 더해 가면서 퍼져 나갈 것이다.

통일부 장관은 그동안 “현 정부 출범 후 북한에 지원된 것을 돈으로 환산하면 5억달러도 안 돼 미국 일본 심지어 김영삼 정부 때보다도 적은데 무슨 퍼주기냐”고 주장해 왔다. YS보다 덜 퍼주면서도 남북관계를 더 좋게 했다는 기막힌 얘기다. 김 대통령이 인정한 2억달러와 미국 국립공원 입장료의 40배에 달하는 금강산 입산료, 그리고 매년 5000억원 넘게 정부 마음대로 집행한 남북경협자금을 빼놓고 계산하면 그 말은 맞을 수 있다.

퍼주기가 아니라 평화유지비용이란 말도 그렇다. 우리가 전쟁 일으킬 리 없기 때문에 평화비용이란 말은 북한이 도발하기전에 미리 건네줘야 하는 돈을 의미한다. 룸살롱의 평화유지를 위해 조폭에게 돈을 줘야 한다는 식이다. 평화를 유지하려면 안보에 힘 써야지 왜 상대에게 돈을 바쳐야 하나. 정부는 분단비용보다 평화유지비용이 훨씬 싸게 먹히고 민족에게 더 희망을 준다고 했지만 북이 핵 개발에 나선 지금의 한반도가 남북정상회담 이전보다 더 평화로워졌고 더 희망적으로 전쟁없는 미래를 얘기할 수 있게 됐는지도 의문이다.

‘대북지원이 북한을 근본적으로 변하게 할 것’이라던 정부의 주장처럼 그들은 변했다. 단지 돈 안주면 대통령 특사도 만나주지 않는 방향으로 변했을 뿐이다. 2억달러 주고 정상회담할 때 만들어진 ‘뒷돈 주면 성사, 안 주면 결렬’의 악선례는 모든 협상에서 북쪽이 한발 움직일 때마다 돈을 깔아주는 관행으로 발전했다. 뒷거래의 단가를 너무 높여 놓았기 때문에 앞으로 이 관행은 두고두고 문제가 될 것이다.

정부가 현대에 신세진 대가로 베푼 ‘봐주기’ 특혜는 재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별났다. 억울한 게 대우였다. 6조원의 유동성만 있으면 충분히 회생할 수 있었는데도 대우는 단칼에 공중분해됐다. 그런데 병세가 더 깊었던 현대그룹은 ‘봐주기’ 덕에 지금까지도 ‘(국민)돈 먹는 하마’로 시퍼렇게 살아있다. 현대에 직간접적으로 들어간 공적자금은 무려 34조원에 달하지만 국민이 앞으로 얼마를 더 부담해야 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여기서 파생될 경제적 문제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질 텐데 ‘정치적 타결’로 매듭지어질까.

▼現代 특혜, 부담은 국민 몫▼

현대는 분명히 엄청난 특혜를 받았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해서 현대는 공연히 정부 심부름 잘못했다가 지금 하루를 꾸려 가기 어려운 지경이 됐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2235억원을 갚을 수도 없고 또 갚을 이유도 없다면 이 돈은 누가 내놔야 하나, 북한이 돌려줄 리도 없는데…. 이것도 그냥 덮어질 문제는 못된다.

그래서 사건은 간단치가 않다. 김 대통령은 남북 화해의 공으로 노벨 평화상을 탔지만 그의 마음이 지금 얼마나 평화로울지는 의문이다.

이규민 논설위원실장 kyum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