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의혹만 무성했던 현대상선의 대출금 4000억원 중 사업비를 제외한 2235억원이 북한으로 송금된 것으로 밝혀지면서 그 처리를 놓고 정국이 파경으로 치닫고 있다. 양파로 비유하자면 이제 겨우 한 꺼풀 벗겨낸 정도인데 벌써 냄새가 진동하니 다 벗기다가는 기절할 지경일 것 같다. 김대중 대통령도 이를 우려해서인지 ‘좋은 취지로 한 일이니 사법처리는 곤란하다’는 입장이고 문희상 대통령비서실장내정자도 ‘검찰수사보다는 야당과의 정치적 타결’로 조기 봉합하려 하고 있다. 이는 여론 파악을 위한 것이겠지만 사실을 확실히 밝혀야 한다는 노무현 대통령당선자의 당초 입장과는 크게 다른 것이다.
▼돈주고 끌려다닌 일방적 관계▼
그동안 남북문제는 정치와 안보라는 시각에만 치중돼 왔다. 그러나 이번의 발표는 기존의 시각을 많이 바꿔 놓았다. 남북간의 문제 또한 거의가 돈 문제로 읽히는 것이다. 북한이 필요한 것은 우리의 돈이지 교류를 통한 긴장완화가 아닌 것이다. 이제 북한이 핵으로 무장하게 되면 이런 일방적 관계는 더욱 심화될 게 뻔하다.
돈으로 북한을 지원하는 것은 그들이 단지 무기를 가졌기 때문은 아니다. 언젠가 통일이 이뤄져야 하고, 그때의 경제파탄을 막기 위해서라도 양국의 소득격차를 어느 정도까지 줄여야 한다. 즉 소득격차를 줄이기 위한 대북 지원은 남한에도 현실적인 통일대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대북 경협은 정부 차원의 일과 민간 차원의 일로 나눌 수 있겠다. 정부 차원에서는 기아를 해소하기 위한 식량공급, 기본적인 설비를 가동하기 위한 최소한의 전기와 에너지 지원이 있을 수 있고, 중장기적으로는 양측의 물류 교육 의료 산업 인프라의 구축이 있겠다.
민간 차원의 일로는 기업들에 의한 제조 및 서비스업에 대한 투자를 들 수 있겠다. 인프라가 구축되면 결국 북한의 경제문제는 민간투자에 의해 해결되어야 한다. 재정지원에는 한계가 있고 정부투자는 일반적으로 비효율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간의 활발한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서는 시장경제 논리가 투자의 근간을 이뤄야 한다.
시장경제 논리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첫째, 거래가 투명해야 한다. 투명하지 않으면 계약을 신뢰할 수 없고, 따라서 투자자가 자금을 대지 않을 것이다. 이번 현대상선의 대북 송금사건은 이런 면에서 큰 시사점을 던져 주고 있다. 이의 처리 방식에 따라 향후 대북 사업의 성패뿐 아니라 한국의 신인도가 큰 영향을 받을 수 있다. 고위층의 대출지시는 없었는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기업을 이용한 측면은 없는가, 대출기관은 적절한 절차를 수행했는가, 대출받은 기업들은 자금 사용에 있어 이사회 의결 등 적법한 절차를 거쳤는가, 회계의 투명성은 확보됐는가, 허위공시 등으로 투자자에게 끼친 피해는 없었는가 등이 초미의 관심사다. 지금 집단소송제도를 도입해 기업의 허위공시와 분식회계 등에 철퇴를 내리겠다는 새 정부가 이 문제에 대해서만은 정치적으로 봉합하겠다면, 누가 그들을 신뢰할 것이며 개혁할 수 있는 정권이라 믿겠는가.
둘째, 대북 투자를 소수의 기업집단에 국한할 것이 아니라 개방해야 한다. 이번에도 현대에 의존한 것이 화근이 되지 않았는가. 또한 남북의 경영과 법 전문가들에 의해 노동, 입지, 사유권 보장 등 투자여건에 대한 자료수집과 연구가 이뤄져야 한다. 따라서 노 당선자가 이끌 2단계 대북 경제정책은 북한에서 작동할 수 있는 경영 소프트웨어를 연구하는 일에서 출발되어야 한다. 현재 우리에게 북한경제에 관한 정보가 거의 없는 것은 북한에 대한 투자가 가시적인 것에만 치우쳐 왔기 때문이다.
▼남북 국민 모두 수혜자 돼야▼
셋째, 대북 사업은 장기적으로도 남북의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북한 주민에게는 직장과 기술을, 우리 기업에는 이윤을 제공하는 상생(相生)적인 것이 돼야 한다. 아울러 대북 사업이 원래의 목적과 달리 북한의 군사적 목적에 악용된다든지, 남한의 특정 정당이나 기업 및 개인을 위해 왜곡되지 않도록 감시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이번의 현대상선 송금 사건이 하나의 정치적 해프닝이 아닌, 대북 지원을 정상궤도에 올려놓아 통일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선우석호 홍익대 교수·경영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