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2월 자신의 목포지구당을 DJ의 장남 김홍업에게 물려준 뒤 지구당 개편대회에서 김홍업(가운데)의 손을 들어주는 권노갑(왼쪽에서 두번째). -동아일보 자료사진
2001년 11월8일 아침.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이상주(李相周) 대통령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오후 민주당 당무회의에서 총재직 사퇴를 공식 발표할 겁니다. 발표문안을 준비해 주십시오. 그리고 한 가지, 기자들에게 공표할 필요는 없지만, 비서실장이 참고로 알아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앞으로 나는 권노갑(權魯甲)씨와는 전화 통화할 일도, 만날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이제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박지원(朴智元)씨는 오늘 오전 대통령정책기획수석비서관직을 사퇴할 겁니다.”
DJ의 전화 지시내용은 당시 민주당 내 쇄신파들이 국정난맥의 책임을 들어 ‘권노갑 외유, 박지원 사퇴’를 요구한 데 대한 대답인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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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수석비서관 출신인 한 인사는 당시 상황에 대해 “DJ는 총재직 사퇴 발표 전날인 11월7일 권노갑과 박지원을 각각 개별 면담, 총재직 사퇴 의사를 밝히며 두 사람의 퇴진을 권유했다. 박지원은 이를 수용했으나, 권노갑은 ‘제가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라고 항변하며 외국행을 거부했다. DJ는 이를 항명으로 받아들였고, 권노갑과 결별을 결심했다”고 전했다.
DJ 정권의 두 축으로 콤비 플레이를 이루며 권력 실세로 활약해 온 권노갑과 박지원의 정치적 명암이 엇갈리는 순간이었다. 박지원은 정책기획수석에서 물러난 지 2개월여 만인 2002년 1·29개각을 통해 대통령정책특보로 화려하게 실세의 위치에 복귀했다. 반면, 이후 조락(凋落)을 거듭한 권노갑은 2002년 5월3일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됐다.
그때까지 권노갑과 박지원은 ‘이’와 ‘입술’처럼 동반자적 관계를 유지했다. 심지어 2000년 총선 즈음 박지원은 지인들에게 “DJ 이후 당권은 당연히 권노갑이다”라고 공언할 정도였다.
박지원은 98년 권노갑이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을 때, 그나마 권부의 소식을 전해주던 유일한 창구였다. 권노갑이 귀국한 이후에는 거의 매일 전화통화를 하며 정국 상황을 논의하던 상대였다. 한 여권 관계자는 “권노갑은 무슨 일이든지 부탁을 받으면, 입버릇처럼 ‘응, 그거 박지원에게 얘기할게’라고 말하곤 했다. DJ와 접촉이 쉽지 않은 권노갑은 자신의 의사를 청와대에 전달하는 통로로서 박지원의 존재가 여간 요긴하지 않았다. 정치적 기반이 약한 박지원으로서도 권노갑의 후원이 필요했을 것이다. 두 사람은 정치적인 공생관계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DJ의 총재직 사퇴를 계기로 금이 갔고 ‘박지원 독주시대’가 열렸다. 이를 두고 권노갑측 일각에서는 “그때부터 박지원이 변했다”는 원망을 하기도 하고, “박지원이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권노갑의 몰락을 조장했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권력의 속성을 모르고 하는 얘기다. 박지원은 기본적으로 DJ 사람이지 권노갑 사람이 아니다. DJ가 권노갑과 결별을 공식 선언한 상황에서 박지원의 선택은 자명한 것 아니냐”고 반박한다.
권노갑이 구속에 이르는 과정도 결국은 냉정한 권력의 속성과 무관치 않았다고 여권 핵심 C씨는 지적했다.
“2002년 초 진승현(陳承鉉) 게이트, 이용호(李容湖) 게이트 등 각종 권력비리가 터져 나오면서 김홍일(金弘一) 홍업(弘業)씨 등 DJ의 아들들이 구설에 오를 때였다. 권노갑 역시 김은성(金銀星) 전 국정원 차장으로부터 돈을 받았느니 하는 말이 나오고 있었다. 코너에 몰린 권노갑측은 ‘김은성은 나와 무관하다. 실제로는 한화갑(韓和甲) 최고위원하고 친하다’는 얘기를 했다. 이에 발끈한 한화갑측은 진승현 게이트로 구속된 민주당 당료 출신 최택곤(崔澤坤)씨가 권노갑의 보좌역을 지낸 인물이라는 점을 거론하며, ‘그럼 최택곤은 누구하고 친하단 말이냐’고 응수했다. 권노갑측은 다시 ‘최택곤은 우리와 인연을 끊은 지 오래다. 최택곤은 DJ 아들들하고 친하다’고 해명했다. 이 대목이 문제였다. 이를 전해들은 두 아들이 ‘DJ 정부에서 공기업 인사를 좌지우지하는 등 권력을 독식한 사람이 누군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는 말이냐’며 펄쩍 뛰었다고 한다. 돌이켜보면 권노갑이 DJ 아들들을 걸고 들어간 것이 결정적인 실수였다는 생각이 든다.”
권노갑의 구속과 관련해 그와 가까운 J씨의 설명은 좀 더 ‘음모론’에 가깝다.
“당시 권노갑의 구속이 아들들의 사법처리를 피하기 위한 ‘희생양’이 아니었느냐는 추측이 무성했다. 실제 그때까지만 해도 권노갑은 박지원과 자주 전화통화를 했으나 구속을 5일 정도 앞두고 연락이 딱 끊어졌다. 권노갑에게 돈을 주었다고 진술한 김은성이 검찰 수사과정에서 우연히 만난 최택곤에게 ‘권노갑 부분은 내가 진술한 것으로 처리될 것이다’는 말을 했다는 소리도 들려왔다. 정확한 증거는 없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권노갑으로서는 자신의 신병처리와 관련해 권력핵심에서 뭔가 사전 논의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의심을 할 만했다.”
당시 게이트에 연루돼 검찰에 불려갔던 모씨도 “권노갑 신병처리와 관련해 검찰이 이미 방향을 정해 놓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고 증언했다.
더구나 권노갑은 그 이전부터 DJ의 아들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정치권에서는 심지어 “권노갑이 각종 게이트에 자신의 이름이 계속 오르내리자 사석에서 ‘비리의 몸통은 DJ의 아들들인데 왜 내게 화살을 겨누느냐’는 불만을 토로한 것이 청와대에 보고됐다”는 얘기도 나돌았다.
J씨는 “권노갑이 인사에 개입하다 보니 아들들과 충돌을 빚는 경우가 꽤 있었다”며 “어쨌든 당시 권노갑은 권력핵심의 뜻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게이트 태풍을 맞아 결국 구속에 이르게 됐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박지원측은 “비서실장의 직책에 있었으니까 권노갑의 구속을 직전에 알기는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검찰로부터 단순히 통보 받은 데 불과한 것이었을 뿐, 검찰 수사 방향에 대해 비서실장이 뭐라고 의견을 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며 일각에서 제기한 권노갑과의 구속 직전 연락두절을 ‘음모론’과 연결시키는 견해를 일축했다.
아무튼 권노갑이 몰락의 길을 걸은 반면, 박지원은 정책기획수석비서관직을 물러난 상태에서도 여전히 당당한 권력을 행사했다.
‘왕특보’로 복귀하기 직전인 2002년 1월 초, 몇몇 기자들과의 저녁 회식자리에서 있었던 일. 당시는 개각을 언제 단행하느냐를 놓고 각 언론에 ‘1월 개각’, ‘3월 개각’식의 엇갈린 추측성 보도가 나가던 상황이었다. 박지원은 회식에 동석했던 공보수석비서관실 관계자에게 기자들이 듣기 민망할 정도로 호통을 쳤다.
“내가 그러더라고 공보수석에게 그대로 전하시오. 개각 얘기가 나오면 공보수석이 큰 갈래를 잡아줘야지, 도대체 뭐 하는 겁니까. 이렇게 신문마다 보도가 엇갈려서 혼선이 생기면 그 부담이 결국은 대통령에게 돌아간다는 것을 모른단 말입니까. 내가 전에 공보수석 할 때는 이런 일이 없었습니다.”
오비이락(烏飛梨落)인지 몰라도, 당시 오홍근(吳弘根) 공보수석은 1·29개각 때 박선숙(朴仙淑)씨로 교체됐다.
당시 청와대에 근무했던 한 인사는 “비서실 공조직을 통해 현안 대처방안을 마련해 DJ에게 보고하면 다음날 그 내용이 뒤바뀌어 내려오는 상황이 다반사로 벌어졌다. 박지원은 물러난 상태에서도 DJ의 최고참모였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당시 비서실에서는 ‘우리가 애써 일할 필요가 무엇이냐’는 자조의 소리가 나오기도 했다”고 말했다.
DJ는 당초 1·29개각 때 박지원을 대통령비서실장으로 복귀시킬 생각이었다. 여론을 감안해 막판에 정책특보라는 우회로를 택했던 DJ는 두달 반 만인 2002년 4월15일, ‘당초 예정대로’ 박지원을 비서실장에 기용해 청와대의 전권을 맡겼다.
▼권노갑과 홍일-홍업 형제▼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두 아들 김홍일(金弘一) 홍업(弘業) 형제와 권노갑(權魯甲)은 ‘조카와 아저씨’ 사이였다. 오랜 야당 생활 동안 두 아들은 권노갑을 ‘아저씨’라고 부르며 따랐다.
그러나 권력을 잡게 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특히 2000년 총선 이후 청와대의 공식 승인 아래 공기업 인사를 전담하게 된 권노갑에 대한 두 아들의 견제는 상당했다.
한 여권 인사의 증언. “2001년 권노갑이 당료 출신 J씨를 한 공기업 임원에 밀어 내정 발표 직전까지 갔다가 아들측의 반대로 무산된 일이 있다. 권노갑이 공기업 인사를 다 했다고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장성 출신인 K씨의 경우 진승현(陳承鉉) 게이트 때 진승현으로부터 거액을 받아 당내 인사들에게 나눠준 사실이 드러났는데도 국영기업 사장 자리에 진출했다. K씨의 고교 동문인 김홍일이 밀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권노갑으로서는 그런 잡음까지 자신이 감당해야 하니, 불만이 없을 수 없었다.”
2001년 말 민주당 쇄신파동과 각종 게이트가 터지면서 양측의 관계는 급속히 악화됐다. 김홍일은 DJ의 당 총재직 사퇴 때 권노갑이 해외 출국 권유를 거부한 것을 두고 노골적으로 권노갑을 비판했다. 당시 권노갑은 DJ 면전에서 김홍일의 인사 개입 문제 등을 대놓고 거론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DJ 아들들의 인사개입 흔적은 게이트 와중에서도 일단이 드러났다.
실제 권노갑측이 ‘아들들하고 가깝다’고 지목했던 최택곤(崔澤坤)은 진승현 게이트로 검찰에 출두하기 직전인 2001년 12월13일 아태평화재단으로 김홍업을 찾아가 구명을 호소하기도 했다. 최택곤은 검찰에서 신광옥(辛光玉) 전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에게 “김홍일이 주는 용돈이다”며 1800만원을 건넸다는 진술을 하기도 했다.
권노갑의 측근 L씨는 “권노갑은 평소 아버지는 모실지언정 아들까지 모실 수는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아마도 그것이 권노갑과 아들들의 사이를 멀어지게 한 근본 이유였을 것이다”고 말했다.
▼특별취재단▼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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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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