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오전 9시반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역 인근 경방필 백화점 앞 로또복권 판매소는 복권을 사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주인 곽영철씨(38)는 “지난해 12월부터 하루 500만원어치의 로또복권을 팔았고 설 직후에는 하루 최고 830만원어치를 판 적도 있다”며 “각종 복권이 등장했지만 로또처럼 광풍(狂風)이 부는 것은 처음”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오전 11시경 이곳에서 가까운 국민은행 지점에도 로또복권 ‘바람’이 하루종일 몰아치고 있었다. 은행 내부 스탠딩 테이블 3개는 로또복권에 숫자를 써넣는 고객들이 아예 ‘점령’하고 있는 실정. 복권판매 창구에는 거의 온종일 10여명이 줄을 서 있었다.》
청원경찰 이영범씨(30)는 “점심 시간에는 출구 밖까지 복권 사려는 사람들의 줄이 늘어선다”며 “로또복권에 숫자를 기입하는 방법을 하루에도 100명 이상에게 설명하다 보니 요즘은 보안담당이 아니라 ‘약장수’를 하는 기분”이라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로또복권의 폐해가 우려할 지경에 이르고 있다. 소액으로 ‘재미’ 삼아 복권을 즐기던 사람들이 카드빚까지 내며 복권중독증에 빠져들고 있다. 분에 넘치는 복권구입 때문에 가정불화가 생기는 경우도 늘고 있다.
▽로또 ‘중독증’ 확산=컴퓨터 프로그래머인 김모씨(29·서울 영등포구 대림동)는 설날 고향에 가는 것을 포기하고 보너스로 받은 60만원을 모두 로또에 투자했다. 그러나 만원짜리 한 장도 못 건졌다는 김씨는 “되면 대박, 안 되면 보너스 안 받은 셈 치고 베팅했다”고 말했다.
회사원 배모씨(32·서울 도봉구 도봉동)는 지난달부터 로또 구입을 위해 신용카드에서 100만원이 넘는 돈을 현금서비스 받고 있다고 했다. 배씨는 “월급을 관리하는 아내 몰래 복권을 사느라 카드를 긁었다”며 “직장 동료 대부분이 로또복권을 사는 분위기도 그렇고, 대박에 대한 꿈 때문에 충동을 억제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에 당첨이 안 되면 카드결제를 할 때 아내와 문제가 커질 것 같다”고 한숨지었다.
여행사 직원인 권모씨(43·서울 양천구 목동)는 최근 부부싸움을 크게 벌였다. 권씨가 ‘대박’에 눈이 멀어 30만원을 로또에 투자했다가 날린 뒤 ‘본전을 회수해야겠다’는 생각에 딸아이의 피아노 학원비 30만원을 또 로또로 날렸기 때문. 권씨는 “성공만 하면 학원비는 아무것도 아니다”고 주장하는 등 복권 ‘중독증세’까지 보였다.
▽‘잃어도 좋다’=로또복권을 구입하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당위론’을 펴기도 한다. 복권 구입에 거액을 투자한 경우가 아니라면 적은 돈으로 1주일을 즐길 수 있는 기능도 있다는 주장이다. 5일 로또복권을 구입한 안하석(安夏錫·59·안경업)씨는 “복권을 사 가족들과 직원들에게 나눠줄 생각”이라며 “다섯 가족이 일주일 동안 즐거운 상상을 하는 것도 일종의 행복”이라고 주장했다.
한달 전부터 하루 한 장씩 로또를 구입하고 있는 수원대 대학원생 이모씨(27)는 “한 번도 당첨된 적은 없지만 실망은 하루, 기쁨은 닷새”라며 “일주일 내내 ‘인생대역전’을 꿈꾸며 사는 것도 즐겁다”고 말했다.
▽전문가 진단=중앙대 사회학과 이병훈 교수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심화된 경제난으로 빈부격차가 심화되면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며 “로또 열풍은 분배와 소비의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봉급생활자 등 서민들의 보상욕구 심리가 반영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 교수는 “서민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안겨준 책임이 있는 정부가 이를 해소하지는 못할망정 한탕주의 등 사회병리현상에 편승해 복권사업을 벌이는 것은 지탄받아 마땅하다”고 말했다.
서울대 심리학과 최인철 교수는 “로또복권 구입은 친구나 가족, 회사 동료들과 함께하는 일종의 사회적 행위가 되고 있다”며 “부담되지 않는 액수로 즐기기 위해 복권을 사는 것은 괜찮으나 문제는 생계를 걱정할 입장에 있는 서민들이 빚을 내 복권을 구입하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으며 그 피해는 결국 서민들 자신에게 돌아간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황진영기자 buddy@donga.com
김성규기자 kimsk@donga.com
▼정부 주머니 불리는 로또▼
로또복권에 당첨될 확률은 얼마나 될까.
45개 숫자 가운데 6개 숫자를 모두 맞힐 수 있는 확률은 814만분의 1.
벼락을 맞아 숨질 확률보다 16배나 더 어렵지만 사람들은 신기루를 쫓듯 로또로 몰려든다.
지난해 12월 1회 판매 때 36억원에 그쳤던 매출은 8주만에 736억원으로 20배 이상으로 커졌다. 두 달 동안의 매출만 1473억원으로 작년 1년간 국내에서 판매된 전체 복권 매출 9000여억원의 15%에 이른다.
▽로또의 경제학=벼락 맞기보다 어려운 확률에 사람들이 매달리는 것은 당첨금이 이월되기 때문이다.
일반 복권은 총 판매액의 50%를 참가자에게 돌려줘 카지노 경마 경륜 등 다른 도박들이 돌려주는 70%대보다 낮지만 로또는 다르다.
당첨금이 몇 번 이월되면 기대값이 자신이 건 ‘판돈’보다 커질 수 있다. 대표적 사례가 인터넷사이트에서 떠도는 ‘전 국민 부자되기 프로젝트’. 로또복권 1등에 당첨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경우의 수(814만개)를 사들이는 비용은 약 162억원이지만 이월된 금액까지 합친 당첨금은 500억원에 이르는 만큼 공동으로 구매해 나눠 갖자는 주장이다.
동양증권 노근환 리서치팀장은 “수학이론에 따르면 기대값이 무한대에 이르는 게임이라도 진입비용이 크면 아무도 참가하지 않는다”면서 “반대로 복권은 진입비용과 당첨확률을 낮추는 대신 당첨금을 키울수록 매력적”이라고 설명했다.
‘도박꾼의 오류(gambler’s fallacy)’로 불리는 심리적 요인도 적지 않다. 복권은 손해보기 마련인 불합리한 투자이지만 누구나 자신이 당첨될 확률을 과대 평가한다는 것.
▽조세 편의주의인가=옛날부터 정부는 이런 개인의 불합리성을 잘 활용해왔다.
고대 로마시대부터 18세기 프랑스의 루이 왕조가 베르사유 궁전을 지을 때도 조세저항이 적은 복권을 발행해 자금을 조성했다.
국내에서도 도박산업 관련 조세수입은 해마다 급증하고 있다. 지난해에만 경마 경륜 카지노 복권 등 4개 주요 도박산업에서 약 2조8000억원의 세금을 거뒀다. 1999년 9858억원에 비해 184.3%, 2001년의 2조2449원에 비해서는 24.9% 늘었다.
로또의 판매수익은 △복권 당첨금 50% △공공기금 30% △시스템사업자(KLS) 9.5% △각종 수수료 10.5% 등으로 배분된다. 1만원 어치를 산다면 5000원을 공공기금에 기부하는 셈.
▽로또의 파생 효과는 어디까지=로또 열기는 관련 종목의 주가로 반영되고 있다.
최대 수혜자는 복권사업을 맡은 온라인복권사업연합(KLS)의 대주주인 범양건영(22.2%). 주가가 지난해 7월초 4000원대에서 4일 1만2400원으로 191.8% 오르면서 시가총액도 600억원가량 늘었다. 복권용지를 독점 납품하는 케이디미디어, 단말기 제조업체인 콤텍시스템 등도 주목받고 있다. 로또 운영자인 국민은행과 편의점도 희색이 만면하다. 로또를 판매하는 편의점들은 평균 고객수가 15%가량 늘어났다. 서울 종로 LG25 업주는 “복권을 사러 온 10명 중 1명은 음료수와 삼각김밥 등 다른 물품을 구입한다”며 “시간이 지날수록 로또의 부수적 수입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이나연기자 larosa@donga.com
이정은기자 lightee@donga.com
▼외국의 로또는▼
작년 12월 국내에 선보인 온라인 방식의 로토복권은 1971년 미국이 처음 도입했으며 현재 60여개국에서 발행되면서 세계 복권시장의 50% 정도를 차지한다.
‘복권의 천국’이라는 미국에서는 80년대 주별로 복권발행기관이 생기면서 전통적인 추첨식 복권이 완전히 사라지고 지금은 로토와 같은 온라인 복권과 즉석식 복권만 발행되고 있다. 특히 로토는 이월 횟수의 제한이 없어 수천억원의 1등 당첨금을 받는 사례가 많다.
가장 유명한 것은 22개주가 연합해 발행하는 ‘파워볼’. 고액 당첨자가 자주 나와 ‘꿈의 복권’으로 불린다. 게임은 하얀 공 49개 중 5개, 빨간 공 42개 중 1개를 추첨하는 방식이다. 1등 당첨금은 일시불 또는 25년 연금식 분할로 받을 수 있다. 파워볼의 인기에 대항하기 위해 조지아, 일리노이, 뉴욕, 오하이오주 등이 연합해서 발행하는 ‘메가 밀리언스’도 대표적인 미국 로토복권이다. 지난해 4월 3억2500만달러(약 3828억원)의 당첨금이 나와 미국 복권사상 최고액으로 기록됐다. 무려 9개월간 1등 당첨자가 없어 상금이 이월됐기 때문에 당첨금이 엄청나게 불어난 것.52개의 숫자에서 5개의 화이트볼을, 또 다른 52개 숫자에서 1개의 메가볼을 추첨하는 방식으로 1등 당첨확률은 1억분의 1이 넘는다.
‘브리티시 로토’를 발행하는 영국은 수익금을 다양한 공익사업에 써 국민의 거부감을 줄이고 있다. TV추첨쇼는 거액의 상금이 걸린 퀴즈쇼와 함께 진행돼 인기가 높다. 숫자 1∼49의 숫자에서 6개를 추첨하는 방식으로 역대 최고 당첨금은 438억원이다.
호주의 주요 도시들이 연합해서 발행하는 파워볼은 ‘OZ 로토’와 함께 호주에서 가장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복권이다.
당첨자가 나오지 않으면 무제한 이월되며 1등 당첨금이 보통 1000만달러가 넘는다. 게임방식은 미국의 파워볼과 유사하다.
대만에선 작년 1월부터 로토가 발행돼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이미 약 260억원의 대박이 터지기도 했다.
숫자 1∼42 중에서 뽑은 6개의 숫자를 모두 맞히면 1등이다. 이월 횟수를 5회로 제한하고 있으며 1등 당첨금도 400억원으로 제한하고 있다.
신치영기자 higgle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