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그늘(3)
방궁이란 시황제가 함양 부근 아방(阿房) 땅에 짓게 한 궁궐이다. 시황제 35년 구원(九原)에서 운양(雲陽)까지 산을 깎고 골짜기를 메워 곧게 도로를 낸 진시황은 함양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함양은 사람이 많으나 선왕(先王)이 지은 궁궐들이 너무 작고 좁다. 짐이 듣건대 주나라 문왕은 풍(豊)에 도읍하고 무왕은 호(鎬)에 도읍하였다고 하니 풍과 호 사이가 바로 제왕이 도읍할 땅이다. 그곳에 천하를 아우른 우리 진(秦)의 위엄을 드러낼 궁궐을 지으리라”
그리고 위수(渭水) 남쪽 상림원(上林苑)에 궁전을 짓게 하였는데, 먼저 아방에 그 전전(前殿)부터 세우도록 했다. 대전은 동서의 길이가 5백 걸음[보]이요 남북의 길이가 5십 길[丈]이었다고 한다. 대전 마루는 그 위에 1만 명이 함께 앉을 수 있을 만큼 넓고, 그 아래에는 다섯 길 높이의 깃발을 세울 수 있을 만큼 덩실했다.
엄청난 것은 궁궐의 규모만이 아니었다. 사방으로 구름다리를 놓아 남산(南山)까지 이르게 하고, 남산 봉우리에 궐루(闕樓)를 세워 표지로 삼으니, 궁궐이 그대로 하늘에 이어진 듯했다. 또 구름다리를 높이 세워 아방에서 위수(渭水)를 건너 함양까지 이르게 함으로서 북극성, 각도성(閣道星)이 영실성(營室星)에 이르는 모양을 흉내냈다.
시황제는 그 궁전을 짓기 위해 궁형(宮刑)이나 도형(徒刑)을 받은 죄수 7십 만을 끌고 와 나누어 부렸다. 한 무리는 바로 아방에서 궁궐을 짓게 하고, 또 한 무리는 여산(驪山)에 나무를 심어 수십 년째 짓고있는 자신의 능묘(陵墓)를 꾸미게 했다. 그들 중에는 북산(北山)으로 끌려가 석재(石材)를 캐내는 일을 하는 이도 있었고, 재수 없으면 멀리 촉(蜀)땅이며 형(荊)땅까지 가서 목재를 끌고 오는 일을 맡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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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시황제는 그 전전(前殿)이 다 지어지면 따로 좋은 이름을 지어 붙이려 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이년만에 시황제가 죽고, 궁궐은 아직 다 지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땅이름을 따서 그 궁궐을 아방궁이라 불렀다.
진나라 이세(二世) 원년(元年) 4월 초순 이세황제 호해는 다시 동쪽으로 순수(巡狩)를 떠났다. 골육인 공자와 공주들이며 여러 대 나라에 공을 세운 대신들을 참혹하게 죽여 감히 자신에 맞설 엄두를 내지 못하게 얼을 빼놓은 뒤였다. 하지만 며칠 되지 않아 함양으로 되돌아온 호해는 갑자기 백관을 불러 모아놓고 말했다.
“선제께서는 함양의 궁궐이 좁다고 여기셨기 때문에 아방궁을 새로이 짓게 하셨소. 그런데 실당(室堂)이 미처 다 지어지기도 전에 선제께서 붕어(崩御)하시니, 일꾼들은 모두 여산으로 보내어져 관을 내리고 능을 꾸미는 일로 돌려졌소. 그러나 이제 여산의 일은 모두 끝이 났소. 그런데도 아방궁을 짓다 만 체로 두는 것은 선제께서 벌이신 일이 잘못되었음을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소. 결코 자식된 자의 도리가 아니오”
그러면서 다시 아방궁을 짓게 하였다. 어쩌면 그것은 이세황제의 허영이 아니라, 아비로부터 물려받아 절대권력을 움켜쥐게 된 자들이 항용 쓰는 수법 - 아비를 추켜세워 그 승계자인 자신의 권위를 강화시키려함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세황제가 효도를 구실로 벌인 대역사(大役事)는 아방궁 말고도 하나 더 있었다. 당시에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가 2천년이 훨씬 더 지나서야 한 농부에게 발견되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진용(秦甬) 또는 병마용(兵馬甬) 조성이 그것이다.
진나라에는 원래 순장(殉葬)의 풍습이 있었다. 순장을 했다는 것은 진나라 사람들이 상상한 사후(事後) 세계에서의 삶이 이승에서와 비슷했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순장은 뒷날 폐지되어도 그 상상만은 그대로 유지되었던 것 같다.
이세황제 호해는 전에 없던 효심(孝心)으로 저승의 아비를 지켜줄 엄청난 군단을 땅속으로 보내려 했다. 그러나 이미 순장이 없어진 뒤라 흙으로 빚어 구운 인형[土俑]군단을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이에 아방궁 공사로 돌리고도 남은 죄수들을 여산 동쪽 십리 되는 곳에 보내 아비의 능묘를 지킬 지하군단을 흙으로 빚어 묻게 했다.
일을 동쪽에서부터 시작하게 한 것은, 시황제가 살아있을 때도 진나라의 적[六國]은 모두 동쪽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이승에서는 그 모두를 멸망시키고 혼일사해(混一四海)를 이루었지만 저승에서는 다른 변괴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먼저 동쪽부터 든든히 해두고 손이 돌아가는 대로 나머지 세 방향에도 차례로 병마를 묻기로 했다.
역사(役事)는 먼저 진흙으로 실물 크기의 토용을 빚는 일부터 시작되었다. 막일밖에 할 수 없는 일꾼들이 잘 이겨 놓은 진흙으로 손재간 좋은 일꾼들이 병사나 말을 빚었다. 그러나 실물 크기여서 한꺼번에 다 빚으면 너무 크고 무거웠다. 말리고 굽기 위해 옮기거나 갈무리하는데 여간 거추장스럽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머리와 몸통과 팔다리 따위로 나누어 빚은 다음 그것을 말리고 불에 구워 굳힌 뒤에야 끼워 맞추었다.
전(實戰)에서와 마찬가지로 배치하려 하다보니, 사람은 보병과 기병, 마부, 궁수(弓手)에 높고 낮은 사관(士官)과 장군들이 모두 빚어져야 했다. 말도 기병들이 타는 말과 병거(兵車)를 끄는 말이 따로 만들어졌다. 거기다가 그늘에 잘 말린 뒤 불에 굽고 색칠까지 해야 일이 끝났다. 눈썹과 눈동자를 그려 넣고 갑옷이며 안장에 멋진 채색까지 한 실물 크기의 말과 사람은 그대로 살아있는 듯했다.
토용을 만드는 일꾼들이 열심히 진흙을 주물러 빚고 말리고 굽고 끼워 맞추고 색칠하는 사이에 다른 일꾼들은 그들 군단이 들어설 굴을 팠다. 위는 열려 있었지만 넉 줄로 늘어선 사람과 말이 수천씩이나 들어설 구덩이라 그걸 파는 일 또한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 구덩이 위를 덮을 목재를 다듬는 일도 만만치는 않았다.
그렇게 되니 시황제 때 아방궁을 짓기 위해 끌려 온 7십만 죄수는 고스란히 함양 부근에 남게 되었다. 거기다가 이세황제는 또 건장한 군사 5만을 함양으로 뽑아 올려 활쏘기를 익히고 군견(軍犬) 군마(軍馬)를 조련하도록 하였다. 그만큼 먹여야할 입이 는 셈이었다.
그들을 모두 먹이는데 함양의 곡식만으로는 모자랐다. 이에 각 군현(郡縣)에서 곡식과 사료를 거두어 함양으로 실어보내도록 했다. 하지만 그 일에 끌려나온 일꾼들은 모두 자기가 먹을 것을 따로 지니게 하고, 함양에서 3백 리 안의 곡식을 먹지 못하게 하니, 백성들이 겪는 어려움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 백성들을 억누르기 위해 법은 더욱 가혹해졌다.
그해 7월에 마침내 반란이 터졌다. 대택향에서 수졸(戍卒)들을 이끌고 들고일어난 진승과 오광이 진(陳)땅에 이르러 ‘장초(張楚)’를 세웠다. 때마침 동쪽으로 사신 갔던 알자(謁者·辭令을 맡은 관직 이름)가 돌아와 반란이 일어났음을 알렸다. 그러나 벌써 절대권력의 독기(毒氣)에 머리가 돌기 시작한 이세황제는 그 발칙한 모반을 믿을 수가 없었다. 벌컥 성을 내며 좌우를 돌아보고 소리쳤다.
“누가 감히 짐에 맞서 들고일어난단 말이냐? 저 놈을 옥에 가두어라. 터무니없는 헛소리로 상하를 아울러 혼란케 한 그 죄를 엄히 물으리라!”.
하지만 이세황제도 속으로는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얼마 뒤에 동쪽으로 갔던 다른 사자가 돌아오자 가만히 불러들여 물었다.
“형(荊)땅에서 모반이 일었다는데 어찌 되었느냐?”
그 사자는 이미 먼저 돌아온 알자가 당한 일을 듣고 있었다. 황제가 듣기 좋은 말만 했다.
“그것들은 하찮은 도적떼로, 각 군현(郡縣)의 수위(守尉)들이 모조리 붙들어들여 없애버렸습니다. 지금은 다시 잠잠해졌으니 지엄하신 폐하께서 심려하실 일이 결코 아닙니다.”
황제가 매우 기뻐하며 그 사자에게 상을 내리니 그 뒤로는 아무도 함곡관 이동(以東)의 일을 입에 담지 않았다.
고는 그때 이세황제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 그 총애로 엄청난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가혹하게 법을 집행할 뿐더러 사사로운 앙갚음까지 곁들이니 사람들은 멀리서 그의 그림자만 보아도 벌벌 떨었다. 못된 관리들이 또한 그를 본받아 백성들을 모질게 다스렸다. 이에 길에 다니는 사람의 절반은 형벌을 받았던 적이 있는 사람들이고, 저자거리에는 사형당한 사람들의 시체가 나날이 쌓여갔으며, 백성들을 많이 죽인 관리가 충신으로 여겨졌다
조고도 진승과 오광의 봉기를 모르지는 않았다. 풀어놓은 눈과 귀를 통해 오히려 금중(禁中)의 누구보다도 사태의 변화를 날카롭게 살피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무시하고 싶어하는 호해에게 그 진상을 알려 쓸데없이 자극하고 싶지는 않았다.
조고는 어려서부터 환관이 되어 긴 세월 궁중에 살면서 거의 본능의 수준으로 그 특유의 정치적 감각을 익혀왔다. 거기에 따르면, 반란으로 긴장된 황제가 자기도취에서 깨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못되었다. 자기 같은 총신형(寵臣型)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자기도취 같은 권력의 치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고 자신은 아우 조성(趙成)을 우두머리로 삼고 더 많은 사람을 풀어 세밀히 천하의 형세를 살피게 하였다. 따라서 그 뒤 진승의 장수였던 무신(武臣)이 자립하여 조왕(趙王)이 되고, 위구(魏咎)는 위왕(魏王)이 되었으며, 전담은(田b) 제왕(齊王)이 된 것도 조고는 알고 있었다. 심지어 옛 초나라 땅에서는 항연(項燕)의 아들과 손자를 자처하는 패거리가 회계군을 중심으로 일어났다는 것까지 알았다. 하지만 그 모두가 강 건너 불만 같았는데 이제 그 아우 조성이 돌아와 사태가 더는 방치할 수 없을 만큼 위급함을 알려온 것이었다.
“소부(少府) 장함(章邯)이 낭중령(郎中令)께 뵙기를 청합니다”
생각에 잠겨있는 조고에게 곁에 두고 부리는 젊은 환관이 알려 왔다. 조고는 얼른 몸을 일으켜 맞으러 나가려다가 짐짓 꼿꼿이 앉아 장함을 불러들였다.
비록 황제의 총애를 받는 낭중령이라고는 하지만, 환관인 조고가 그래도 구경(九卿)의 하나인 소부를 앉아서 맞는다는 것이 큰 무례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조고에게는 굳이 그럼으로써 떠보고 싶은 게 있었다. 바로 장함의 사람됨이었다.
진승과 오광의 반란이 심상치 않다는 걸 진작부터 알았으면서도 조고가 나서서 황제를 깨우쳐주지 않은 까닭에는 황제가 정신차려 정사에 전념하는 것이 자신에게 이롭지 않다는 것 말고도 하나 더 있었다. 곧 황제가 유능한 장수를 뽑아 반적(叛賊)들을 쳐부수고 공을 세우게 함으로써 새로운 몽염(蒙恬)이 생겨나는 게 싫어서였다. 이제 하는 수가 없어 평소 장수의 자질이 있다고 알려진 장함을 추천하게 되었지만, 먼저 그 됨됨이를 알아두고 싶었다.
(일껏 저를 장수로 세워줘도 공을 세운 뒤에 등을 돌리면 호랑이 새끼를 기른 꼴이 되고 만다. 내 평생에 두 번 다시 몽염 형제와 같은 적은 만들고 싶지 않다….)
그게 차가운 얼굴로 감추고 있는 조고의 속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