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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김순덕/호모 로또리우스

입력 | 2003-02-10 18:04:00


이제 한국인은 또 하나의 학명(學名)을 갖게 됐다. 호모 로또리우스. ‘하이패밀리’라는 가정문화시민단체가 새롭게 지어낸 말로 ‘로또에 중독된 사람’을 뜻한다. ‘숫자만 보면 여섯 자리 조합을 한다’ ‘로또나 로또 기입표를 갖고 다닌다’ ‘당첨금을 어디에 쓸지 고민해본 적이 있다’ 등 20개 항목의 자가진단표에서 14개 이상이면 중독성에 낀다. 번거롭게 점수 매길 것까지도 없다. ‘인생역전’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벌렁벌렁하거나 누가 당첨됐다는 얘기만 들어도 괜히 내 돈을 빼앗긴 것처럼 분이 솟구친다면 당신은 2003년 초 대한민국을 흥분시킨 호모 로또리우스의 일원이라고 봐도 틀리지 않다.

▷로또 옹호자들은 복권 열풍이 우리나라만의 현상은 아니라고 말한다. 최근 미국소비자연맹에선 미국인 4명 중 1명이 노후준비에는 저축보다 복권을 사는 게 낫다고 여긴다고 전했다. 일주일에 25달러짜리 복권을 40년간 사봤자 연리 7%로 쳐도 28만6640달러에 ‘불과’하다. 이에 비해 복권 한번 터지면 최소한 50만달러니, 이게 훨씬 남는 장사라는 거다. 이자는 곤두박질치는데 실업률은 높아가고, 조세정책은 있는 자에게만 유리하게 돌아가므로 돈 없고 희망 없는 사람들은 별 도리가 없다. 복권이나 사는 수밖에.

▷복권이 ‘빈자(貧者)들의 세금’이라는 말도 여기서 비롯된다. 없는 사람들끼리 십시일반 돈을 거둬 한 사람에게 몰아 준다는 의미에서다. 미국의 도박영향에 관한 연구위원회에 따르면 고졸 이하 학력자는 대졸자보다 4배 많이, 흑인들은 백인보다 5배 더 많이 복권을 산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 호모 로또리우스들은 서민층만이 아니라는 점에서 유별나다. 중상류층 일부를 제외한 전 국민이 로또에 열광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노래패 ‘우리나라’는 새노래 ‘Jotto!! 인생역전’에서 이렇게 일갈했다. ‘폭폭한 세상에서 믿을 거라곤 정치종교 필요없다 복권뿐이다/한 큐에 역전 한번 해 보고 싶어 못살겠다 찍어보자 복권뿐이다/…열심히 일해 봐도 안되더라…빡세게 살아봐도 Jotto!!’

▷호모 로또리우스를 구하기 위해 다음 회차부터는 로또 1등 당첨금을 대폭 줄인다고 한다. 인생역전은 로또 발행 주관사인 국민은행과 10개 정부기관이 해 놓고서 이제 와서 병 주고 약 주는 셈이다. 그러나 로또 당첨금 이월횟수가 두 번으로 제한된다고 해서 호모 로또리우스가 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열심히 일해 봐도 안 되는 세상, 정치도 종교도 믿을 수 없는 사회풍토가 뒤바뀌지 않는 한 호모 로또리우스는 계속 번성할 수밖에 없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