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산부의 몸으로 경기에 출전한 정창숙이 결승전에서 신중하게 시위를 당기고 있다. 대전=원대연기자
‘아가야. 엄마가 널 너무 힘들게 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다. 대신 네가 태어나면 편안하게 해 줄께.’
10일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열린 제6회 한국실업양궁연맹회장기 실내양궁대회. 남산 만큼 부른 배를 복대로 조이고 여자부 개인전 준결승에 나선 정창숙(30·대구서구청)은 경기전 뱃속의 아기에게 혼잣말을 했다. 아기를 가진 뒤로 정창숙은 사선에서도 늘 아기와 대화를 한다. 서로의 교감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얘기를 나누다 보면 가끔 아기가 발로 엄마를 차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정창숙은 “엄마 말을 듣고 있구나”하며 배를 쓰다듬는다.
국내 양궁대회의 개막전인 이번 실내양궁대회엔 현 국가대표를 포함해 각 실업팀의 내로라하는 선수들이 모두 출전한 권위있는 대회. 여기서 임신 9개월의 정창숙은 다른 선수들을 모두 물리치고 4강에 올랐다.
후배인 김은령(여주군청)과 맞선 10일의 준결승전. 18m 앞의 표적지를 향해 12발을 쏴 승부가 나는 실내양궁대회는 고도의 집중력과 배짱이 요구되는 경기. 더구나 이날은 TV중계까지 해 선수들의 긴장상태가 평소보다 더 했다.
2엔드(3발이 1엔드)가 끝났을때까지 스코어는 57-56으로 김은령의 리드. 하지만 3엔드 첫발에서 단숨에 승부가 갈렸다. 정창숙이 쏜 화살이 과녁 한가운데를 꿰뚫으며 10점. 반면 김은령은 8점을 쏴 점수가 역전됐다. 마지막 스코어는 115-113. 정창숙은 경기가 끝난 뒤 “3엔드 첫발을 쏘려 할때 갑자기 뱃속의 아기가 꿈틀했다. 빨리 쏘라는 신호같았다. 엉겹결에 쏘고나니 10점짜리였다”며 웃었다.
정창숙은 결승전에서 국가대표로 최고의 기량을 보이고 있는 안세진(대전시청)에게 115-118로 패했다. 하지만 만삭에 가까운 몸으로 준우승한 것도 대단한 일. 임신후 체중이 10㎏ 가까이 늘어난 데다 양궁선수에게 필수적인 체력훈련(웨이트와 서키트트레이닝)을 전혀 소화하지 못한 상태에서 순전히 감각만으로 활을 쏴 2위에 오른 것이다.
“집에 있을 때는 자주 발로 차던 아기가 훈련장이나 경기장에서 활을 집어들면 신기할 만큼 얌전해져요.”
그는 “아기가 엄마가 양궁선수인 줄 아는 것같다”며 “아기를 가진 뒤 오히려 심리적으로 편안한 상태가 돼 기록도 좋아졌다”고 말했다. 97년부터 4년간 태극마크를 달고 각종 국제대회에 출전했던 정창숙은 양궁계에선 알아주는 실력파.
“임신했다고 누워있는 것보다는 운동을 계속하는 것이 출산에도 좋을 것 같았어요. 남편도 흔쾌히 찬성해줬구요. 나중에 아기에게 ‘엄마가 널 뱃속에 넣고 대회에 나가 준우승 했단다’라고 얘기해주면 좋아하겠지요.”
다음달 말 출산예정인 그는 다음주 상무실내체육관에서 열리는 제16회 전국실내양궁대회에 마지막으로 출전할 예정이다.
한편 이날 남자부 결승전에선 상무의 최원종이 인천계양구청의 김경호를 119-118로 누르고 1위에 올랐다.
대전=김상수기자 ss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