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당선자가 이끌어갈 ‘참여정부’의 출범이 10여일 앞으로 다가왔다. 새 정부의 등장을 기다리면서 필자는 50여년 전의 영국을 떠올리게 된다.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보수당의 윈스턴 처칠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총선거를 치르게 되었다. 모두가 전쟁 영웅 처칠이 이끄는 보수당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지만 정작 선거에서는 노동당이 승리했다. 이에 따라 영국은 최초의 노동당 정부 수립이라는 역사적 전환을 맞이했다. 이 선거 결과는 당시 충격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지만 후대의 역사가들은 전쟁 기간 중 우파 정부에 협력하면서 온건한 이미지를 국민에게 심는 데 성공한 노동당이 이념적 완고함에 사로잡혀 있던 보수당을 제압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고 이해하고 있다.
▼‘다수의 뜻’이 항상 옳지는 않아▼
노무현 정부의 출범은 극적인 승리의 드라마를 연출했다는 점에서 1945년 영국의 노동당 정부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공통점은 양자가 모두 새로운 변화를 적극 수용하면서도 꾸준한 온건화를 모색하려 했다는 점에 있다.
노 당선자가 지난 40여일간 보여 온 궤적을 두고 요즘 다양한 해석이 제시되고 있다. 직접민주주의의 전성시대가 도래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권력의 주류가 확연하게 교체되었다는 해석도 들린다. 그러나 필자는 지난 40여일간 당선자와 인수위가 보여 온 행보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작년 초부터 시작된 선거운동 과정을 거치면서 지속된 ‘온건화 드라이브’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노 당선자는 북핵 문제의 해결에 있어 기존의 민족 중심적인 해법에 더해 한미 공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나섰고 지난 달에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방미 요청을 수락한 바 있다. 노 당선자는 최근 재벌개혁 정책에서도 속도와 폭을 적절하게 조절하겠다고 언급했다.
이러한 온건화 추세에 대해 한편에서는 보다 강력한 개혁이 미흡하다고 불만을 토로할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그간의 염려를 다소 덜었지만 앞으로도 지켜보겠다는 입장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온건화의 추세는 사실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에서 부닥치는 당위의 문제이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후보는 ‘언어와 약속의 세계’에서 살지만 선거 이후 당선자는 ‘선택과 행동의 세계’에서 활동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는 온건화 자체가 아니라 그 내용과 성격에 있다. 온건화라는 것이 단지 어정쩡하게 현실과 타협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온건화가 개혁의 이상과 현실을 기계적으로 절충하는 것도 아니다. 일정한 원칙과 방향이 전제될 때 온건화는 효과적인 정책으로 이어지고 성공적인 정부 운영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이러한 원칙과 방향은 누가 설정하고 누가 지켜 가는가.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가능성을 떠올리게 된다.
첫째는 대통령 개인의 경험, 판단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권위주의일 것이다. 그 정반대의 가능성은 다수의 의사를 최우선으로 하는 대중주의다. 노 당선자가 권위주의를 철저히 배격하려 한다는 점은 이미 명백하다. 그러나 대중주의의 경우는 다소 문제가 복잡하다.
‘참여정부’라는 명칭에서 보듯 새 정부는 대중의 보다 많은 참여에 큰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실제로 그동안 정상적인 출구를 찾지 못하던 정치참여 열기가 폭발하면서 우리 사회에는 요즘 대단히 활발한 의사표현이 이뤄지고 있다. 이는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현상이다.
▼열린 자세로 해결책 찾기 나서야▼
그러나 우리는 다수의 뜻이라고 하더라도 열린 자세로 임하는 토론을 거치지 않았다면, 또한 공공의 선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면 그것은 단지 중론(衆論)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민주주의의 고전적인 딜레마는 모든 정당성의 근본인 다수의 의사가 때로는 변덕스러울 수도 있고 때로는 옳지 않을 수도 있다는 데에 있다. 여기서 우리는 중론이 아닌 ‘공론(公論)의 장(場)’을 이끌어가는 적극적 시민의 노력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일터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에 열중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의 문제를 고민하는 시민들은 이제 문제의 해결책을 함께 찾는 공론의 장으로 한 걸음 더 나와야 한다. 이들에게 노무현 정부의 성공 여부뿐만 아니라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가 걸려 있다.
장훈 중앙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