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민이 그린 자화상. 애완견과 자신을 동일시했다. 사진제공 성곡미술관
‘나는 겁이 많다. 수긍하는 척하지만 고집이 세다. 꿈을 잘 꾼다. 코도 많이 곤다. 씻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친할 때는 밸도 없이 무지 안긴다. 팔에 기대어 자는 것을 좋아한다.’
화가 고정민씨가 적은 ‘나와 다른 나’다. 그럼, 그의 그림에 나타난 ‘나’는 어떤 모습일까? 뜻밖에도 애완견이다. 고씨는 자화상을 ‘저절로 그리는 그림(auto painting)’이라고 했다. 무의식 상태에서 그리는데 꼭 애완견의 얼굴이 나온다고 했다. 애완견의 다양한 표정으로 자기 자신을 표현한 그의 그림을 보면, 웃음이 배어 나온다. 그러나 낯설지 않다. 그가 그린 애완견의 얼굴에 바로 내가 있기 때문이다.
성곡미술관에서 13일∼3월30일까지 열리는 전시 ‘I,You,Us (나, 너, 우리)’ 전은 작가 14명의 자화상전이다. 이 전시는 흔히 자화상하면 떠 오르는 화가 자신의 얼굴들이 아니다.
극사실주의적인 묘사로 거울에 비친 자화상을 그린 김홍주의 작품에선 차가움과 따뜻함이 함께 느껴진다.
20대부터 60대에 이르는 작가 14명이 내놓은 자화상들중 전통적인 의미의 자화상을 내놓은 작가는 김차섭과 김홍주. 김차섭의 자화상에는 서구의 합리주의가 거세해 버린 우리 본연의 모습에 대한 분노와 냉철한 의지가 엿보이며 극사실적인 묘사를 한 김홍주의 자화상을 대하면 주관적인 시선을 철저히 배제해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나머지는 다양한 표현들이 등장한다.
김진정의 ‘마스크’(현대와 전통 접목)에는 전체에 부속된 하나의 부품으로만 여겨지는 현대인들의 초상이 담겨 있고 권여현이 열두명의 제자들과 함께 그린 ‘예수와 제자들’ 집단 초상화에는 인간사이의 정(情)이 느껴진다. 윤유진의 오징어 얼굴, 김정욱의 과장된 표현, 미래의 자기 모습을 키치적으로 표현한 황규태의 독특한 작업들은 거대담론이 사라지고 명실상부 ‘자아’의 시대인 현재를 확인케 해 준다. 02-737-7650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