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정권의 대북 비밀송금은 그동안 감춰졌던 실체의 모서리가 여기저기 삐져 나오면서 이제는 영락없이 ‘사건’이 되고 말았다. 2억달러로 시작된 규모도 점차 늘어날 조짐이어서 어느 선에서 전모가 드러날지 모를 일이다. 초법적 ‘통치행위’라는 기묘한 발상이 나왔는가 하면, 현대의 대북사업 독점권 확보를 위한 경제협력이란 주장도 나왔지만 모두 부질없는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이젠 어떤 논리로도 북한측에 은밀히 건네진 돈은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간의 남북정상회담 성사를 위한 밑돈이었다고 믿는 더 많은 국민을 설득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숨기고 덮으면 될 것이라는 생각이 옴짝달싹할 수 없는 ‘사건’으로 만든 셈이다.
▼감시기능 제대로 했나▼
구린 구석이 많을수록 감추고 싶어하는 것이 권력의 속성이다. 그리고 내세우는 방패막이가 국가안보요, 국가이익이다. 대북 비밀송금의 통치행위론도 이런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북한 핵사태로까지 악화된 남북관계와 비밀송금으로 빚어진 민심의 악화를 어떻게 안보와 국가이익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입이 열이라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이번 사건을 대하면서 다시 한번 강조되는 것이 언론의 국정 감시기능이다. 국정운영이 투명하다면 더 말할 나위 없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 국민의 눈을 피해 밀실에서 이루어지는 모책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일은 언론이 할 일이다. 지금 한국사회는 음지로만 파고들던 대북정책으로, 또 이를 제때에 감시 못했던 까닭에 쌓이고 쌓인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한꺼번에 치르고 있는 셈이다. 1971년 미국의 펜타곤 페이퍼가 폭로됐을 때 미국 언론들은 미국 정부가 베트남전에 개입하기까지, 밀실회의에서 얼마나 많은 오판을 거듭했는지를 알게 됐다. 또 그 과정에서 언론은 군사개입을 정당화하려는 정부의 기만술에 어떻게 넘어가고 말았는지를 알고는 경악했다. 스스로를 ‘온순한 언론’이라고 자조했다. 지금 우리가 그 지경이다.
남북정상회담이 있은 2000년 6월 이후부터 여러 의혹이 제기됐다. 회담 성사를 위해 북으로 거액이 넘어갔으며 싱가포르니 마카오니 구체적인 지명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액수도 4억달러에서 7억달러까지 분분했다. 그 해 추석엔 송이버섯 선물을 싣고 온 북측 비행기가 그냥 돌아갔겠느냐는 이야기가 나돌기도 했다. 퍼주기식 남북교류엔 의문점이 계속 제기됐지만 어떤 설명도 제대로 들은 적이 없다. 언론도 민족통일이란 거대 담론의 환상에 매몰되고 국가안보와 국가이익을 지레 생각해서 알아서 긴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질문해도 대답 않고 관련 자료를 요청해도 응해주지 않으니 어떡하란 말이냐고 이유는 댈 수 있다 해도 감시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비싼 값을 치르고 얻은 한 가지는 권력 핵심 인사들의 두루뭉술한 반응일수록 거짓에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됐다는 점이다. DJ정부도 둘러만 댈 것이 아니라 어느 시점에서 설명하고 그에 따른 여론을 소화했더라면 지금 같은 상황은 피할 수 있었다. 대북 비밀송금이 공식 거론된 것이 지난해 9월 국정감사 때였으니 5개월의 시간을 허송한 셈이다. 그 기간 중 사건은 더욱 꼬였다.
▼민주주의가 죽는 이유는▼
권력의 닫힌 문 안에서 벌어지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일들이 어디 이것뿐이고, 한두 건이겠는가. 여기서 국민생활에 영향을 주는 정책결정자들을 파고들고, 답을 끌어내는 감시기능의 중요성이 다시 명확해진다. 특히 국가적으로 중대한 시기에 감시기능이 강조되는 이유는 사회 구성원들에게 변화예측과 대비를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최근 노무현 대통령당선자와 대통령직인수위측에서 경기위축 보도에 대해 “경제에 악영향을 주고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언급한 것은 적절치 못하다. 예단하고 싶지는 않지만 새 정권 언론관의 일단이 드러난 것이 아닌지 찜찜하다. 새 정부로선 좋은 여건에서 출발하고 싶겠지만 분명한 지표로 나타나는 각종 경고 신호를 무시할 수는 없지 않은가. 무디스의 신용평가 하향 전망은 무슨 이유이겠는가. 외면한다고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 언론을 향해 던진, ‘문이 닫히면 민주주의는 죽는다’는 경구가 떠오른다. 권력의 닫힌 문을 열어야 한다.
최규철 논설주간 ki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