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그릇은 너무나 쉽게 금이 간다
막 빚어놓은 점토였을 때
그때부터 이 그릇은
밑바닥이 너무 좁았는지도 모른다
위쪽이 너무 무거웠는지도 모른다
장식을 너무 달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그릇은
몇번이나 불가마에 들어갔던가
그릇 저 깊은 곳
그림자까지 말려버리는
섭씨 3천도 불의 단련!
그. 러. 나.
이 그릇은 너무나 쉽게 금이 간다
눈빛, 눈빛에 찔려서 금이 가고
목소리, 목소리에 긁혀서 금이 간다
그릇과 그릇이 닿을 때마다
너무나 요란한 소리가 난다.
―’이 그릇은 너무나 쉽게 금이 간다’
고흐가 보리나주라는 탄광촌에서 지낼 때의 일이다. 그는 굵은 삼베자루로 헐벗은 몸을 간신히 가린 한 노인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물건을 포장했던 그 자루에는 ‘파손 주의’라는 글자가 인쇄되어 있었다. 짐짝처럼 걸어가는 그 노인의 등은 청년 고흐에게 인간의 몸과 영혼이란 얼마나 깨지기 쉬운 존재인가를 말해주고 있었다.
한명희 시인이 ‘이 그릇은 너무나 쉽게 금이 간다’고 말할 때도, ‘이 그릇’이란 삶의 부조리와 불안을 누구보다도 예민하게 느끼는 독신 여성의 자화상을 가리킨다. ‘그림자까지 말려버리는/ 섭씨 3천도’의 불가마 속에서 몇 번씩 구워진 후에도 유난히 금이 잘 가는 그릇. 그런 점에서 고통을 통한 단련도 상처를 견디는 완전한 내성을 주지는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처음부터 무언가 잘못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일까.
그의 시집 ‘두 번 쓸쓸한 전화’(천년의시작)에는 사소한 눈빛이나 목소리에도 찔리거나 긁히면서 존재가 내는 소리들이 사금파리처럼 아프게 박혀 있다. 그러나 시인은 눈물 젖은 눈으로 상처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 낡고 감상적인 방식 대신에 풍자와 비애를 결합시켜 경쾌하게 세상을 찌른다. ‘나는 껌이다/ 심심풀이다’라고 거침없이 시작된 시가 ‘모든 컴컴한 입들아/ 쓴맛을 모르는/ 상한 혀들아’(‘나는 껌이다’)로 끝나는 걸 보면 사금파리는 어두운 세상과의 싸움에서 얻은 그만의 순결한 무기이기도 한 모양이다.
나희덕 시인·조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