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전 개봉된 미국 영화 가운데 손가락을 제외한 전신이 마비된 법의학자가 연쇄살인범을 잡는다는 범죄 스릴러 영화가 있다.
영화에서 그가 흉악범을 잡는 방법은 여성 경찰관이 범죄현장에서 본 사실을 첨단 통신기기를 통해 전달하면 이를 토대로 판단한 뒤 그가 다시 여성 경찰관에게 지시를 내려 범인을 쫓는 방식이다.
영화에서나 가능한 것으로 여기겠지만 이와 비슷한 일이 태평양 상공을 날고 있던 두 여객기 사이에서 실제로 일어났다. 흉악범을 잡는 게 아니라 위급 상황에 처했던 어린 생명을 구했다는 차이가 있다.
사건은 3일 오전 8시 태평양 상공을 비행중이던 대한항공 KE002편 기내에서 발생했다. 미국 로스앤젤리스를 출발, 일본 도쿄로 향하던 비행기에서 태어난 지 14개월 된 정리라양이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진 것.
승무원들이 즉시 응급조치를 취했지만 좀처럼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탑승객 가운데 의료인을 찾았고 일본인 간호사 2명이 나섰다. 그들의 간호로 상태가 호전되는 듯 했지만 30여분 뒤 다시 열이 오르면서 정양은 의식을 잃었다.
승무원들은 인근 상공을 비행중이던 대한항공 KE018편에 '응급 구조 요청' 신호를 보냈다.
로스앤젤리스를 출발, 인천으로 향하던 이 비행기에는 다행히 흉부외과 전문의 김병대 박사가 타고 있었다.
김 박사는 조종실에서 통신용 헤드셋을 통해 환자의 상태를 전해 들은 뒤 급성폐렴이라는 잠정 진단을 내리고 간단한 처방을 내렸다. 태평양 상공의 두 항공기 사이에서 원격진료가 실시된 것이다.
이후에도 KE002편이 일본 나리타공항에 내릴 때까지 4시간30분 동안 정양은 두 어 차례 고비를 더 겪었다. 하지만 두 항공기 승무원들의 적극적인 대처와 한일 양국 의사와 간호사의 노력으로 무사히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황재성기자 jsonh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