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미국 컴퓨터 제조업체 휴렛팩커드(HP)의 칼리 피오리나 회장은 3년째 한국을 찾았다. 본사 회장이 3년 연속 특정 국가를 방문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게다가 그는 아시아 지역에서 한국 지사만을 방문하고 돌아갔다. 피오리나 회장이 해마다 얼굴을 비추는 데는 한국 정보기술(IT) 시장의 중요성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한국HP를 이끌어온 최준근 사장(50)에 대한 개인적 믿음이 한몫했다.
장수 최고경영자(CEO)는 한국 기업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주한 외국기업들 사이에도 오랫동안 경영능력을 발휘해온 ‘토종’ CEO들이 있다. 외국기업들은 진출 초창기에 주로 자국인을 데리고 와서 대표직을 맡기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면 지역밀착형 경영을 위해 현지인에게 대표 자리를 물려주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토종’ CEO는 본사의 선진 경영기법과 현지 경영문화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균형을 맞춰야 하기 때문에 ‘장수’하기가 쉽지 않다.
핀란드·덴마크계 식품재료 회사 다니스코의 조원장 한국 지사장(46)은 16년 동안 대표 자리를 지켜왔다. 그는 자일리톨, 식이섬유, 투명 병맥주 등의 히트 상품을 한국에 소개했다.
그는 2001년 자일리톨을 시장에 내놨을 때 국민구강보건연구소, 충치예방연구회 등을 찾아다니며 제품 기능을 설명했다. 기능성 식품재료인 만큼 전문가들의 의견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90년대 중반 식이섬유를 내놨을 때도 그는 먼저 영양학자들을 상대로 홍보하는 데 주력했다. ‘전문가 마케팅’이 성공하면서 한국 다니스코는 직원 7명의 초미니 한국 지사임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400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직원 1명당 약 60억원의 매출을 올린 셈이다.
직급없는 기업문화를 지향하는 한국 오라클의 윤문석 사장(가운데)이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직원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제공 한국오라클
한국 오라클 800여명의 직원들은 상대방을 부를 때 직급을 붙이지 않는다. 윤문석 사장(52)이 직급 호칭 시스템을 없애버렸기 때문. “대리 과장 차장 부장 등의 직급에 따라붙는 권위주의를 타파하기 위해서”라고 윤 사장은 설명했다. 대우에 근무하다 93년 한국오라클로 자리를 옮긴 후 영업통으로 활동해온 그는 97년부터 회사를 이끌어왔다.
올해로 9년째 한국HP를 이끌고 있는 최 사장은 1999년 한국에서 한창 IT붐이 일 때 10억달러 매출을 올려 본사 경영진을 놀라게 했다.
지난해 한국HP는 본사가 뽑은 ‘아시아·태평양 최고 지사’에 선정되기도 했다. 82년 삼성그룹 내에 설립된 한국HP 소프트웨어 연구소에 엔지니어로 입사하면서 HP와 인연을 맺은 그는 20여년간 줄곧 한국HP에서 근무해왔다. ‘인재 관리’를 중시하는 최 사장은 ‘적게 뽑아 오랫동안 키운다’는 본사 원칙에 따라 외환위기 때도 거의 직원을 해고하지 않은 외국기업으로 유명하다.
비자코리아의 김영종 사장(58)은 화려한 경력이 먼저 눈에 띈다. 뉴욕 체이스맨해튼은행 부장을 거쳐 한국푸르덴셜 생명보험, 동아증권 대표 등을 거쳤다. 98년 그가 사장을 맡고 난후 비자카드는 마스타카드를 제치고 국내 신용카드 발급 부문에서 1위로 올라섰다. 실적이 크게 오르면서 자신감도 커졌다.
그는 한국을 방문하는 본사 직원들에게 “3일이상 머무르지 않으려면 오지 말라”고 주문한다. 그만큼 본사에게 한국 사정을 정확히 파악하려는 성의와 노력을 보여달라는 것이다.
정미경기자 micke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