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정도만 지나면 한국 현대사에서 ‘김대중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된다. 곧 퇴임하게 될 김 대통령은 ‘햇볕정책’의 기치를 들고 얼어붙은 한반도의 남북관계에 물꼬를 트는 6·15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켜 노벨평화상을 재임 중에 수상하는 개인적 영예를 누렸다.
당시 그를 축하하는 글 가운데 독일의 권위지 ‘디 차이트’의 발행인인 헬무트 슈미트 전 총리가 보낸 공개축전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DJ는 세 전선에서의 화해정책에 성공했다. 첫째 자신을 지워버리려고까지 했던 국내의 정적(政敵)에 대해, 둘째 반세기 동안이나 분단된 북쪽의 스탈린주의적 독재자에 대해, 셋째 왕년의 점령국가 일본에 대해서.
▼통일은 '국토' 뿐 아니라 '사람'도▼
5년 임기를 마치고 머지 않아 동교동 사저로 물러날 임기 말 DJ의 모습은 그러나 별로 밝지 못하다. 같은 ‘디 차이트’의 전 발행인인 테오 좀머 대기자는 ‘세 아들 콤플렉스’가 DJ의 차질을 초래했다고 적고 있다.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의 아들인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김일성의 아들인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그리고 감옥에 갇힌 DJ 자신의 아들들….
더욱이 퇴임을 앞두고 DJ는 의혹이 짙어가기만 하는 ‘대북 송금 사건’과 관련해 국민에게 사과성명까지 발표하는 불명예를 감수했다. 대북정책의 추진 과정에서 위법 사실이 있었음을 시인하되 자신에 대한 평가는 ‘민족과 역사’에 묻겠다는 뜻인 듯하다. DJ의 대국민 담화를 둘러싸고 물론 정치권에서는 그 반응이 엇갈리고 있다. 그건 늘 우리가 구경해온 대로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그런 여야의 찬반 논의와 아랑곳없이 포폄(褒貶)이 극단적으로 갈라지는 DJ의 햇볕정책을 ‘민족과 역사’의 시각에서 평가하는 데 참고가 될 몇 가지 기준의 체크리스트를 제시해보고자 한다.
우선 앞에 인용한 슈미트 전 총리의 축전도 하나의 평가기준이 될 것이다. 노벨상 수상 후 3년, DJ는 과연 국내 정적과의 화해에, 북쪽 독재자와의 화해에, 그리고 일본과의 화해에 성공하고 있는가. 그 화해는 의로운 화해인가.
그 다음으론 6·15 남북정상회담 직후 두 군데 신문에 발표한 대북정책에 관한 나의 ‘스리 에센셜(3대 필수요건)’도 햇볕정책의 평가에 참고가 될 듯해 다시 적어 보겠다.
첫째, 햇볕정책으로 한반도에 전쟁의 위험이 제거되고 평화가 정착되었는가. 둘째, 이산가족을 비롯해 남북한 주민들이 자유롭게 상호 방문할 수 있게 되었는가. 셋째, 경제적으로 몹시 궁핍한 2000여만 북녘 동포의 삶이 나아졌는가.
햇볕정책의 정당화를 위한 준거로 흔히 인용하는 과거 서독의 ‘동방정책’은 이 세 물음을 높은 수준에서 만족시키고 있었다. DJ의 대북정책의 성과는 어느 정도일까.
과거 서독에서는 그때까지 있었던 통독성(統獨省)을 없애버린 바로 그 해(1969년)에 한국에서는 그때까지 없었던 ‘국토통일원’을 창설했다. 참으로 잘못된 이름으로! (그 뒤 아주 오랜 후에 이름이 고쳐지긴 했지만)
갈라진 것은 국토만이 아니라 그보다도 더욱 소중한 민족이, 사람이 갈라진 것이다. ‘국토’ 분단의 극복인 ‘국토통일’을 추구한다면, ‘실지회복’(이승만) ‘남반부 해방’(김일성)이 그 귀결이다. 처참한 동족상잔만 가져온 6·25 남침을 ‘통일전쟁’으로 수긍해보려는 위험한, 그야말로 반민족적 비인도적 입론이 그런 구석에서 똬리를 틀고 있다.
▼北주민 못 보는 관광은 실패작▼
햇볕정책을 평가하는 또 다른 검증 기준으로 나는 DJ의 대북정책이 ‘사람’보다 ‘땅’만을 생각하는 이승만 박정희 김일성의 ‘국토통일론’, 민족보다 권력의 영향범위만을 보는 ‘국토우선론’을 얼마나 극복하고 있는가를 따져 본다. 그를 위한 계량적 평가로선 통계 수치를 보면 된다.
예컨대 아름다운 북녘의 국토, 금강산이나 백두산을 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방북했는가, 그에 비해 사람, 즉 헤어진 가족과 친지를 만나기 위해서는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방북했는가를. 남쪽에서 수만 수십만명의 사람이 북한을 자유로이 찾아가 금강산관광을 하면서 막상 북한에 거주하는 동포라곤 경비원과 안내원밖에 보지 못한다면 이건 뭐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된 것 아닌가.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언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