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헌(鄭夢憲) 현대아산 회장이 어제 기자회견에서 보인 자세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대북 송금 해명’ 때만큼 실망스러웠다. 현대는 오로지 남북경협을 통해 통일에 기여하고자 했으며 대북사업 독점은 국익을 위한 것이었다고 틀에 박힌 주장을 했다. 결국 정부와 현대가 말맞추기로 다시 한번 국민을 우롱한 셈이다.
정 회장은 대북사업 독점권의 대가로 5억달러를 북에 주었다고 처음으로 시인하면서도 구체적인 내용을 밝히기는 거부했다. 대북 송금에 국가정보원이 편의를 제공한 데 대해서는 “대통령이 말씀하신 대로”라고 했고 현대상선 외에 현대건설과 현대전자도 북한에 돈을 보냈느냐는 질문에는 “자세히 이야기할 수 없다”고 했다. 또 송금 경위는 “지금 밝힐 수 없다”는 식이다. 핵심적 의혹을 이렇듯 모른다, 밝힐 수 없다면서도 입으로는 국민에게 죄송하고 사과한다고 했으니 국민을 우롱한 게 아니고 무엇인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자세다.
다만 정 회장은 “대북 송금이 남북정상회담에 일정 부분 기여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해 정상회담 직전에 부랴부랴 북에 보낸 돈이 ‘정상회담용 뒷돈’이었을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았다. 이는 현대의 대북 뒷거래가 현 정부의 대북정책과 한 묶음으로 이루어져 왔음을 시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김 대통령은 정상회담과 관계없었다고 말했으니 둘 중 하나는 거짓말이다. 그러니까 진상을 규명하자는 것이다.
배경이야 어떻든 온갖 불법과 탈법이 자행된 것이 분명한 대북 비밀송금 사건을 정부와 현대의 말맞추기로 덮을 수는 없는 일이다. 더욱이 현대가 대북사업을 빌미로 이 정부로부터 엄청난 특혜를 받은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현대에 쏟아붓다시피한 수십조원의 자금지원이 결국 국민 부담이라면 현대는 오히려 국익을 해쳤다는 편이 옳다.
정부와 현대가 끝내 진상을 밝히지 않고 국민을 거듭 우롱하려 든다면 타율적인 진상규명이 불가피하다. 진상규명만이 국익을 위한 길이다.